장대비가 밤새도록 내리더니 오늘도 하루 종일 쏟아붓는다. 어떻게 저리 많은 물이 하늘에 담겨 있었는지, 노아의 홍수 때는 40일간을 쉬지 않고 내렸다니 참으로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아무리 연구한들 조물주의 지혜와 신비를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욥에게 주시는 말씀은 더욱 하나님을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바라보게 한다.

“비가 아비가 있느냐 이슬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얼음은 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욥38:28-29).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내가 환난 때와 전쟁과 격투의 날을 위하여 이것을 저축하였노라”(욥38:22-23).

장차 대환난 마지막 심판의 때에는 상상할 수 없는 재앙이 예고되어 있다.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 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계16:20-21).

지금껏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대지진이 일어나고 34kg의 초대형 우박들이 떨어질 것이다. 누가 감히 엄위하신 하나님을 대적하겠는가. 그리 무자비한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감히 따질 것인가?

이런 대재앙의 원인은 하나님이 무자비해서가 아니다. 한없이 자비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거부한 자들이 망쳐놓은 지구를 다시 뒤엎어 새롭게 재창조하려 하심이다.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시고 아들 예수님을 죽이시기까지, 영혼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잊고는 무엇을 따질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는 온갖 욕망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서로 미워하고 죽이려는 악함을 언제까지 참으셔야 한단 말인가!

구원받을 영혼들이 자신들의 탐욕과 부정함을 회개하며 하나님께 다 나아왔을 때, 더이상 그 큰 사랑을 원하는 사람들이 없을 때,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마지막 재앙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이는 오래 참고 참으신 결과요 다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사랑이시다.

젊은 날 마틴 루터는 장대비가 오는 날, 함께 시골길을 가던 친구가 벼락에 즉사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만 큰 두려움과 공포 속에 벌벌 떨면서 하나님을 찾았다. 친구의 죽음 앞에 하나님께 항변하기보다는 납작 엎드리었다. 그리고 그는 평생을 주님을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기도 중 환상이든 계시든 영음이든 자신의 부정한 삶에 대한 책망이 있을 때, 이때를 위해 오래도록 참으셨던 하나님의 안타까움과 크신 사랑을 생각치 못할지라도, 최우선적인 일은 무조건 납작 엎드리는 것이다. 나를 위해 아들까지 죽이신 하나님께 무슨 불평을 한단 말인가. 게다가 낱낱이 심판한다면 벌써 죽어 끝났을 죄인을 이토록 오래 참아 견디신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 앞에 어찌 감히 따지려는가. 그저 교만과 미련함을, 포학과 아집들을 토하는 것밖에는 할 것이 없다. 마음속 깊이 숨겨진 동기까지 자세히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속일 수 있겠는가.

진실로 피할 수 없는 심판의 때가 코앞에 있다. 죽음으로라도 피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죽어도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12:36-37).

점점 더 사람도 지구도 예측 불가능으로 치달린다. 매일 주님의 긍휼을 구하며 낮게 엎드리는 것만이 사는 길이다.          

 

 박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