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로 보는 세상
우리나라가 폭력과 살인의 불안에 놓여있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신림역 흉기 난동’과 ‘서현역 무차별 칼부림’ 등의 흉악 범죄가 이어진 가운데, 외신에서도 이를 주목하며 알파벳 그대로 표기한 ‘Mudjima’라고 표현했다. 최근에는 온라인상에 ‘살인 예고’ 글이 자주 올라온다.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언급한 살인 예고 글이 온라인에 퍼지면서 대중들은 더욱 불안해하고 있다. 묻지마식 흉기 난동은 한마디로 사회가 더 위험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며 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또한 가뭄, 홍수, 지진, 해일과 같은 자연재해도 갈수록 심각한 상황임이 전해진다. 거기에 전쟁이나 핵의 위험, 화재, 강도, 강간과 같은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오고 있으며 대다수 국민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구조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나면서 주거에 대한 불안감까지 더해지고 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온 세상이 불안과 두려움에 빠져 있다. 이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이상 행동을 하기도 하고, 이상한 종교가 생겨나기도 한다. 문제를 회피하거나 합리화하고, 거짓말을 하고, 폭력을 일삼으며, 자신을 부정하거나 이웃을 부정하고 관계를 무참히, 혹은 일부러 간악하게 깨뜨리기도 한다. 이기심은 극으로 치솟고, 믿는 것보다는 의심부터 해야 안심이 되는 현실이 되었다.
세상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오고, 이어 주님의 뜻을 살피게 된다.
진짜 두려운 날
우리가 아는 성경 속 낙원 에덴동산은 불안과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곳이었다. 죄가 들어오면서 두려움이 시작되었고 불안이 이어졌다. 이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살아 숨 쉬는 동안 불안과 두려움을 유전으로 받아야 한다. 출생부터 무덤까지 불안과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자녀도 마찬가지다. 이미 불안과 두려움에 쌓인 세상을 살기 때문에 그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고스란히 보고 느끼며 불안해야 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매일 넘어지고 연약해서 실수하고 그러다가 자신의 모습에 낙망하고 침체에 빠지고 영적생활에서 멀어지기도 한다.
찬양 중에 ‘주여 우린 연약합니다. 오늘 하루를 힘겨워합니다. 주여 우린 넘어집니다. 오늘 하루 또 실수합니다.’라고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노래하는 것에 깊이 공감을 한다. 내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울고 있을 수 없고 두려워 떨 수만은 없다.
죄가 들어와 불안해지고 두려워진 우리가 할 수 있는 믿음과 확신의 길을 부지런히 갈고 닦아 나가야 한다. 정말 두려운 것이 있다. 나의 개인적인 종말의 순간이 언제 올지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또 인류 종말의 순간도 도적같이 올 수 있다고 하셨으니 눈을 크게 떠야 한다. 타작마당에서 알곡과 쭉정이가 구별되는 상황에 놓인 나를 상상하기만 해도 너무 두려운 일이다.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12)고 주님 말씀하셨으니 말이다.
많은 이들이 영원한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지옥의 형벌에 대해서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저 오늘이 중요하다. 이것이야 말로 참으로 두려운 일임에도 말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예수님은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셨지만 회개하지 않는 고라신과 벳새다 사람들을 향하여 책망하셨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11:21-24). 회개하길 선포하시지만 그들은 주님의 책망에도 교만하여서 회개치 않았고, 심판에 대한 불안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한 채 오늘이 영원할 것처럼 즐기고, 천국과 지옥, 영원한 심판도 불신하는 그들은, 가장 가련한 죄인들이다.
그날의 영광
하나님은 창조와 타락과 구속의 과정을 거쳐서 온 세상을 심판하실 그날을 정하셨다. 그래서 그날은 반드시 우리 앞에 닥칠 것이다. 베드로는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3:10)고 말하며 우리에게 경고의 말을 전한다. 자각하지 못하자 주님은 기후를 흔들어 이것 보라고 말씀하고 계시고, 사람들의 악함을 통해 정신 차릴 것을 말씀하신다.
심판의 날이 오고 있다는 인식하면서 사는 삶을 ‘깨어 있다’고 한다. 깨어있음의 범위는 신앙을 넘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경건한 삶을 살도록 해준다. 작은 일에도 주님의 맘을 좇아 행하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도와주며, 다시 오셔서 이루어 주실 그 영원한 나라의 소망을 갖고 살아가도록 한다. 또한 주변을 깨우는 경성의 역할도 한다. 전도의 도구로도 사용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망과 불행의 두려움에서 건지셔서 참 자유와 평강의 나라를 선물해 주시려고 우리를 부르셔서 깨우고 날마다 단련하시는 것이다. 영원한 나라에 살아갈 자격이 주어지도록 우리를 보석처럼 만드시는 것이다.
주님의 오심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소망이다. 이 소망이 있기에 성도들은 시험과 핍박을 견딘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하면서 크고 작은 것들을 열거하신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10:41-42)고 하신다. 낱낱이 기억해서 상주시겠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은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위로하며, 결코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설 것을 명한다.
성 어거스틴은 “과거는 주님의 자비에 맡기고 현재는 주님의 사랑에 맡기고 미래는 주님의 섭리에 맡겨라.”고 말했다.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는 모두 다 주님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소란함과 불안, 슬픔, 아픔, 질병 등 죄로부터 오는 모든 어둠들은 빛이신 주님이 오셔야 끝이 난다. 그래서 주의 오심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살아가는 힘의 근원이다.
얼마 전 몸의 질병으로 힘든 어느 집사님이 안타까운 고백을 하신다.
“목사님. 제가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몸이 아프니까 차라리 죽고만 싶더라고요. 그래서 37층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갔는데, 이대로 죽으면 지옥 갈까 봐 울다 내려왔어요. 주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너무 힘들어요.”
같이 울고 기도하면서 위로를 드렸지만, 나의 연약함도 이와 같음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안하고 평화가 깨진 상황은 이 땅에서 매일 매 순간 일어난다. 아주 작은 사소한 것으로부터 때로는 몸의 질병, 경제적 어려움, 인간관계, 불의의 사고 등 갖가지 불안이 파도처럼 엄습하는 곳이 이 땅이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우리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날들이어야 하고, 그분이 오심이 참 평안의 날임을 거듭 소망하고 기대하며 신앙적 가치관으로 굳건히 정립해야 한다.
언제나 심판대를 생각하고, 성령 하나님의 섬세한 임재를 구하며 오늘 주어진 하루를 성실하게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가야 하고 살아내야 한다. 참 평안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고대하고, 그분의 나라가 속히 임하기를 원하는 간절함으로 말이다.
그날에 하늘이 열리고 영광의 주가 오실 때 우린 참 평강을 보게 되리라. 오래 견딘 마음을 만지시고, 슬픔으로 흘린 눈물을 씻기며 손잡아주실 내 주님을.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