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신학대학교 경쟁률과 충원율이 곤두박질치면서 입학 문턱도 낮아지고 있다. 국내 학령인구 감소 탓에 입학생들의 성적 하락은 대학들이 흔히 겪는 일이지만 신학교와 신학과는 특히 타격이 크다고 한다. 익히 이름만 대도 아는 신학교들은 물론이고 각 교단 총회 소속 신학교들도 사명감 없이 지원하는 학생들이 소명이나 목적의식 없이도 쉽게 목회의 길에 들어선다는 점이 문제라는 점이다. 이는 투철한 소명 의식을 갖고 신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의 사기를 꺾기도 하고, 교단마다 다음 세대가 사라져가는 절박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인구감소라는 대의명분도 있지만, 십자가로 상징되는 사명감의 결여를 가장 큰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제자의 길, 즉 사명감을 감당하는 것이 싫다는 반증이라 볼 수 있다. 십자가를 찾지 않는 시대,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는 시대요 그에 따른 사명자의 부재를 생각하게 되는 안타까운 시대가 되었다.
십자가를 지며
한평생 시각장애인으로 은혜로운 영혼의 찬송시 10,000여 편을 쓴 세계 최고의 찬양 전도자이자 찬송가 시인 화니 제인 크로스비의 찬송시 핵심은 십자가다. 늘 십자가를 가까이했기 때문이다. 찬송가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로 가까이”, “인애하신 구세주여” 등 대부분 회개와 십자가에 대한 찬송시를 썼다. 미국인이 대통령보다 더 존경하는 금세기 최고의 인물이 되었고, 한국인이 뽑은 가장 은혜로운 찬송가의 작가가 됐다. 십자가를 가까이함으로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하고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위대한 인물이 된 것이다.
우리 예수님을 보자. 십자가를 지기 전, 얼마나 고통스럽게 기도하시면서 그 길을 아프게 받아들이셨는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는 위대한 인류 구원의 길이었지만 그 길의 무게가 쉽지 않음을 인자이신 예수님은 보여주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기도하시던 순간부터 십자가의 길은 철저히 고독하고 외로운 길이었고 배신과 치욕과 눈물과 아픔 속에 걸어가야 할 길이었다. 누구도 함께해 줄 수 없고 오직 홀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순종이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사명이란 학문으로 사명의 사(使)자는 ‘심부름할 사’다. 학교나 회사의 작은 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소사(小使)라 부르고, 나라의 큰 심부름하는 사람을 대사(大使)라 한다. 특별한 심부름 하는 사람을 특사(特使), 몰래 심부름하는 사람을 밀사(密使)라 한다. 하나님이 보낸 심부름꾼을 천사(天使)라 하고, 제자를 사도(使徒)라 부르며, 심부름하는 사람을 사자(使者)라 한다. 그리고 사명의 명(命)자는 ‘목숨 명’자다. 그러므로 사명이란 “심부름 받은 목숨”이란 뜻이 되니 하나님의 심부름 받은 사람은 사명을 받은 사명자인 셈이다.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은 “사명을 갖는 자는 그것을 실현할 때까지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했다. 사명을 받은 사람은 집념과 열의, 강한 의지와 신념이 있기에 내가 이것을 이루기 전에는 절대로 죽을 수 없다는 요지부동한 목적의식이 있음을 말한 것 같다. 사명을 영어로는 ‘mission’이라고 한다. 라틴어 ‘mission’에서 온 말로 ‘mission’은 ‘보낸다’는 뜻이다.
루터나 칼빈 모두 기독교인의 모든 직업을 소명이라고 보았다. 영어의 vocation이나 독어의 Beruf 모두 소명, 직업이라는 뜻이다. 어원적으로 ‘부르심’을 의미한다. 세속의 직업이 모두 사명, 또는 소명이라는 뜻이다. 변호사, 엔지니어, 구두 수선공, 유치원 교사, 목사 등 모든 직업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중이다. 그 일에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 책임이 따른다.
에베소서 4장 22절에서 24절의 말씀처럼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이다. 내가 속한 곳에서 십자가를 바로 지는 것이다. 가정, 교회, 직장 등이 다 십자가를 지는 곳이다. 왜 나를 보내셨는지 예수님의 뜻을 깨닫고자 힘쓰며 진실하게 제자로 머물러야 한다.
순종하는 삶
예수님의 선택을 받은 이들은 대부분 어부들이었고 세리 마태도 있었으며,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루려던 열혈당원 시몬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왜 그런 사람들을 뽑으셨을까? 예수님의 제자 선발 기준은 주님의 뜻을 삶의 가장 앞자리에 두는 사람, 그리고 우선순위로 먼저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는 사람이었다. 주님께서는 뽑으신 그들을 가까이에 두셨고, 그들에게 권한과 사명을 주시며 길 잃은 양들을 향해 열방으로 파견하셨다. 제자로 선발된 각자의 이름은 성경에 기록될 정도로 맡은 바 사명을 수행했다. 그들 대부분은 죽기까지 주님의 뜻에 충실했으며, 부족함을 느낄수록 주님께 더 의탁하고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놓았다.
예수님의 제자 선발 기준은 우리의 생각과 달랐고 성경은 그것을 증명한다. 만약 나라면 어땠을까. 아마 예수님의 명령이 떨어지면 늘 먼저 따지고 계산하다 어떤 것은 순종하지 않고, 어떤 일은 결국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도 생겼을 것이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마10:2-3).
이들은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는 말씀에 맞게 언제나 버리고 비우며 순종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며 그대로 닮고자 했다. 그래서 자신들의 사역을 거룩하게 완성해 간 분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6)고 하시면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사명들을 하나님께 의지하며 나아갈 때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용기를 주셨다. 순종하면 주님이 이루신다.
섬기는 십자가
손양원 목사님은 애양원 교회에서 1200여명의 한센병(나병) 환자들을 돌볼 때 환부에는 사람의 침이 좋다고 하여 환자들의 환부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냈다. 이러한 헌신과 섬김은 영혼을 사랑한 진정한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목사님의 이러한 삶의 모습을 보았던 모든 교인은 자연스럽게 존경하게 되었으며 이 존경심은 바로 목회자의 권위가 되어 능력 있는 목회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모범적으로 빛을 발한 모습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사명을 감당한 것이다.
요한 크리소스톰의 성직론 3권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은사 가운데 최고”의 것을 성직이라 말한다. 그런데 성직에로의 부름을 가능한 피해야 하는 이유를 말한다. “성직에 나아가게 될 때 그들은 경험 부족으로 눈뜬장님이 되어 버리고, 그들을 세워 주었던 많은 성도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부과시키게 되는 것”이라고 명백히 밝힌다.
특히 성직자의 사명을 받은 이들은 명예를 향한 인간적 야심을 버려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 안에서 직분을 바로 감당하게 된다고 한다. 특히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은사 가운데 최고인 성직을 감당함에 있어 영적 책임감을 가지고 임해야 함을 역설한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 같은 무지하고 무책임한 행동들, 즉 밝은빛 가운데 모범이 되어 성도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지 않고 정과 욕심을 추구하는 삶을 살며 영적 방향으로 바르게 인도하지 못하는 성직자는 하나님께 책망받을 것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풍성히 거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싸움은 복합적인 것이며, 다양한 종류의 원수들과의 싸움임을 바울은 말씀하셨다. 그런즉 주의 자녀 모두는 거룩한 사명을 받들어 더 충성스럽게 십자가를 지고 밝은빛 좁은길을 달려가야 한다. 지금 주께서 명하시고 인도하사 머물러 있으라 하신 그곳에서 기쁨으로.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