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3일 있었던 상암 집회는 한국교회가 회복되고 다시 부흥하기를 바라는 모든 크리스천의 마음에 소망의 불씨를 지폈다. 7만여 명이 모인 대성회는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길 간절히 소원하면서 “회복과 부흥”을 목청껏 외치는 장엄하고 엄숙한 시간이었다. 


격세지감

1973년 5월 처음 열렸던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는 닷새간 320만명이 모였다고 하니 격세지감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이번 집회에서 그의 아들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님은 복음의 가치를 설교하면서 “한국은 50년 전과 많이 달라졌지만,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며 “오늘부터 회개하고 죄로부터 돌아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일찍이 일제강점기 때 3.1만세운동과 독립투쟁에 앞장섰고, 임시정부의 수립도 기독교인이 주도했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제헌국회 제1차 회의가 이윤영 의원(목사)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시작했던 한국교회가 아닌가. 6.25전쟁 때는 수많은 목회자와 교인들이 공산주의에 저항하여 순교했으며, 한국 사회의 발전에도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돼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 곳곳에서 기독교인이, 교회가 문화와 교육을 주도하면서 가난과 비관에 빠졌던 한국사회를 긍정과 희망의 사회로 만든 게 사실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축복으로 한국교회는 크게 성장해 해외에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하고 있고, 국가도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첫사랑의 감격을 잃었던 탓에 한국교회가 양적인 성장도 멈추었고 국민들의 신뢰는 18%대로 추락하고 말았다.

한국교회총연합 대표회장인 이영훈 목사님이 ‘국민비전클럽 6월 예배’에서 작심하고 쓴소리를 했다. 한 정부 관계자를 만났는데, “교계에 왜 이리 ‘사’자 목사들, 사이비 목사들이 많냐”고 물었단다. 일면식도 없는데 이 행사, 저 행사에서 사진 함께 찍은 것을 이용하고, 지난해 한 호텔에서 열린 당선인도 알지 못하는 ‘윤석렬 대통령 당선 축하모임’에는 500여명의 교계인사들이 몰렸다는 것이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를 왠 ‘사’자 목사들이 이렇게도 많은지 불편한 현실을 꼬집어 비판했다.   

지금 유럽과 미국교회의 쇠락을 가속화한 동성애 물결이 한국을 뒤덮고 신천지 등 이단의 준동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한국교회를 하나 되게 하고, 사회를 선도해야 할 목사들이 정치나 하고 있는데 대한 탄식이자 위기의식의 발로였다. 그의 옆자리에 앉았던 국가조찬기도회장 출신의 한 장로님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돈을 이용해야 하는데, 돈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나님만 바라보지 않고 이중적으로 목회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탄했던 것이다. 

진정한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는 더 줄고, 어줍잖은 목회자를 양산하는 신학공장만 있다는 씁쓸한 자조가 교계에서 나온지 오래다. 이명희 종교국장(국민일보)은 일을 하면서 만나본 목회자 중에는 세상에 본을 보이는 주의 종인지 ‘꾼’인지 모를 목회자, 인격이 세상 사람보다 딱히 나을 게 없는 목사와 장로들도 많이 만났다고 한다. 편협하고 위선적인 일부 목회자와 크리스천들의 모습은 믿는 사람들마저 실족하게 만든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며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마21:12,13)고 책망하셨다. 진리와 구원을 가르쳐야 할 목회자가 높은 지위를 얻고 재물을 모으는 데만 관심을 쏟으니 교회가 언론의 질타의 대상이 된 게 아닌가. 

대한민국은 지금 저출산, 동성애, 기후 위기 등 풀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과거에는 난제를 해결하고 사회를 선도하는 중심에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목회자는 존경의 대상이었고, 본받고 싶은 모범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교회가 빛과 소금은커녕 사회의 욕을 먹고 손가락질당하는 적폐대상이 되고 말았다. 


회복과 부흥 

이제 다시 한국교회가 영성을 회복하고 새롭게 부흥돼야 하리라. 회복과 부흥을 위해선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 1903년 원산대부흥, 1907년 평양대부흥, 1973년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 등, 대부흥의 공통점은 회개로부터 시작됐다. 회개 없는 부흥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양적 성장과 물량주의에 빠졌던 것을 애통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한다. 교단정치에 매몰되어 분열을 거듭했던 과오를 뉘우치고 순전한 복음의 기치 아래 하나로 연합해야 한다.  

왜 우리의 영성생활이 이다지도 힘이 없고 마귀와 세상과 자신과의 싸움에서 무기력한가. 많은 성도가 ‘이건 아닌데… 세상적인 누룩이 섞이지 않은 순수하고 고양된 진리가 있을 텐데’하며 방황하고 있다. 교회에서 열심히 일은 하지만 막상 집으로 돌아오면 허전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들으면 분명 기복적인 것이 아닌데, 왜 우리는 대형주의·물질만능·출세성공주의에 빠져들었는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시119:105) 했다. 우리의 생활 구석구석을 환하게 비춰 줄 하나님의 밝은 빛과 순전한 진리가 필요하다. 내 더럽고 추악한 본성이 제거될 수 있는 강렬한 성령의 역사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일치되기를 갈망한다. 관념이 아닌 실제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되기를’(롬8:29) 간절히 소망한다. 

이번 여름은 불볕더위가 예상된다는데, 그보다 더 뜨거운 성령의 부흥을 가슴 깊은 곳에서 염원해본다. 열일 다 제쳐두고라도 우리를 그리스도께 미치게 하는 성화의 복음을 찾아 나서고 싶다. 피를 토하며 “예수님께 아주 미치자!”던 이용도 목사님의 절규를 다시 한번 듣고 싶다. 

“주여, 너무 영적으로 메마르고 곤고합니다. 한국교회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수 있는 회복과 부흥의 진리로 저희를 인도하소서. 우리에게 영적 대각성이 절박하게 필요합니다. 어디서 하나님의 순전한 양식을 찾을 수 있사오리까?”

듣자. 오랜 가뭄 끝에 ‘늦은 비’를 기다리듯 타는 목마름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갈망하는 저 절규를. 내 신앙과 인생관에 괄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나기를 소원하는 절박한 심장소리를.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교리로써가 아닌 살아 역사하여 내 삶에 획기적인 회복과 부흥이 일어나기를 염원하는 영혼의 기도를. 

“주여, 하나님의 빛이 밝게 비춰지는 말씀으로 우리의 잠든 심령을 깨우소서. 긍휼하신 아버지여, 이 땅의 황무함을 보시고 다시 회복과 부흥을 허락하소서. 지구온난화의 우기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3가뭄재앙의 전조임을 깨닫고, 주의 임박한 재림과 하나님의 대심판이 가까웠음을 일깨워주소서. 우리의 비루함과 비천함을 속속들이 드러내시고, 성령의 맑은 물로 정결하게 하옵소서!”

 

 

이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