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길을 걸으면서도, 사무실에서도,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아이들이 발을 까딱이며 앙증맞은 모습으로 불렀던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라는 찬양이 입가에 계속 맴돌았다. 

지난 토요일, 신학생들과 함께한 성지순례 여정에서도 자연스레 그 찬양이 흘러나왔다. 2시간 남짓 지나 솔뫼성지에 도착하여 예배를 드린 후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려는데 많은 인파가 드넓은 성지에 북적북적 댔다. 그래서인지 두 번째 방문한 조용한 신리성지가 더 차분하고 성스러웠다. 초록 평원과 어우러진 작은 예배실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숙연해졌다. ‘이곳은 기도하는 장소입니다.’라는 글과 함께 순교자들의 짧은 어록을 읽어가는데, 마음의 우물에 은혜가 가득 고였다. 

“나는 이미 천당 가는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이 세상의 과거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황석두) “좋으신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거룩한 복음의 증인이 되어 제 피를 쏟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조선입니다.”(위앵 루카) “나는 솔직히 죽는 것을 몹시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죽는 것보다 몇천 배 더 무서워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나의 주님이시요,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일입니다.”(손자선) 

마을주민 400명 모두가 순교했던 거룩한 땅을 밟으며 ‘나도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라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 그리고 칼날 앞에서도 영웅처럼 달려 나갔던 순교자들의 삶이 부럽기도 하고 경의가 표해졌다. 그들이 두려움과 맞서며 용감하게 순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예수님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졌습니다.”라는 다블뤼 선교사의 고백처럼, 그들 모두가 오직 주님 한 분만을 원하고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중에 한 분, 황석두(1812-1866)는 충청도 연풍의 부유한 양반집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가문의 영광을 위해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하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며 공부를 열심히 시켰다. 그런데 20세가 되던 해 과거를 보러 가던 길에 주막에서 한 신자에게 말씀을 듣고, 큰 감명을 받은 그는 집을 떠난 지 3일 만에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놀란 아버지에게 자신이 과거 시험에 급제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실 그의 말은 하늘의 시험에 합격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화가 난 아버지는 "예수교를 믿으면 집안이 패가망신하는 줄 모르느냐?"고 하며 아들을 심하게 꾸짖고 때렸으나, 어떤 위협에도 그는 전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는 작두를 마당 가운데로 가져다 놓고 아들에게 명하여 목을 작두에 걸라고 하였다. 온 집안이 벌컥 뒤집혀 졌는데 그는 태연히 목을 작두에 내밀었다. 아버지가 빨리 밟으라는 엄명을 내렸지만, 하인이 차마 작두를 밟지 못했고 이에 아버지는 통곡하면서 사랑방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모진 핍박 속에서도 침묵을 지키며 성서를 열심히 탐독하였다. 그의 온 가족은 애달파하며 다방면으로 그의 무언증을 고치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3년이 되던 어느 날, 그는 읽던 성서를 조용히 내려놓고 마침내 입을 열어서 “아버지”라고 불렀다. 매우 놀란 아버지는 대단히 감격해서 ‘네가 믿는 종교가 참된 도(道)인지도 모르겠다.”하고 뜻밖에도 입교의 의사를 표현했다. 그 후 그의 부친을 비롯하여 온 가족은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그는 엄격한 절제와 금욕생활을 하면서 외국 선교사들을 도와 열정으로 일하였다. 

그 후 병인박해로 인해 여러 신자가 체포되자, 그에게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라.’는 다블뤼 선교사의 권면에 “지금까지 선교사님을 모셔 온 제가 피신하다니 될 말입니까? 선교사님 혼자 천국에 가시려는 심사이신가요?”라며 포졸들에게 자신도 다블뤼 선교사와 같은 길을 가겠다고 간청하였다. 그는 고통 앞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도리어 용사와 같이 십자가를 지고자 하였고, 순교를 간절히 원하고 바랐다. 결국 그의 소원하는 바대로 성금요일에 보령 갈매못에서 장렬하게 순교하였다. 

한때 나도 순교자가 꿈이었고, 내 인생의 목표는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익은 열매였다. 그래서 ‘모든 소유를 다 버렸던 위대한 성인들처럼, 십자가를 지고 오직 주님만을 따르기를 원합니다.’라는 기도를 자주 드렸었다. 그런데 그 목표가 점점 흐릿해지자 영적인 힘도 약해지고, 모든 것이 시들시들해졌다.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와서 천로역정을 읽는데, 샘물을 마신 기독도가 간난산으로 용감하게 달려가는 모습에서 강한 의욕이 솟구쳤다. “간난산이 높다고 한들 어이 내 못 오를쏘냐. 길이 비록 험악한들 어이 내 앞 막을쏘냐. 생명 길이 여기임을 내가 정녕 알리로다. 피곤 두려움 다 물리치고 용기 떨쳐 올라가자. 비록 곤란할지라도 옳은 길은 복 받는다. 비록 평탄할지라도 그른 길을 앙화일다.”

피로서 믿음을 증명한 용감한 순교자들과 기독도의 용기백배한 노래가 한소리로 나를 흔들어 깨웠다.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익은 열매라는 목표를 향해 전력투구하라. 어떤 큰 고통이 따를지라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다시 용사와 같이 달려가라’는 소리가 마음에 쿵쿵 울렸다. 메마른 내 심령에 맑은 물이 부어지는 듯했다.

누구나 하나님의 생명을 얻으려면 험준한 골고다 언덕을 지나야 한다. 헐벗어도, 건강을 잃어도, 매를 맞아도, 피를 흘려도 끈기 있게, 충성스럽게, 용감하게 달려 나가야 한다. 주님이 앞서가신 그 복된 길, 십자가의 길로 용사와 같이 정진할 때 하늘 보좌를 차지할 수 있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도,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짓밟혀도 생명을 얻기까지 용감하게 달려 나가자. 칠전팔기!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서 전진하자. 그곳에 하늘의 영광이 임한다.

주님이 곧 문 앞에 이를 것이다. 지금은 세상의 정욕에 널브러져 노닥거릴 때가 아니다. 긴 광야가 지루하다고, 지쳤다고, 고난이 싫다고, 더는 못 가겠다고 엄살 부릴 때가 아니다. “주님,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비참히 돌아가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하겠습니까.”라던 주기철 목사님처럼 일사 각오 정신으로. “주여, 제 피를 다 쏟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가득 채워주소서.”라며 어떠한 육체적 고통도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이현필 선생님처럼 용감하게 달려가야 한다. 아무리 가파르고 험난해도 예수님을 따랐던 믿음의 용사들처럼 분연히 일어나야 한다. 세상 부귀와 영예도, 허례와 위선도 과감히 끊어버리고 용감하게 달려 나갈 때 성령님의 강력한 은혜가 임한다. 

‘간난산이 높다고 한들 내 못 오를쏘냐!’ 주님이 함께하시면 넘지 못할 산이 없다. 앞으로 넘어야 할 험난한 산을 바라보며 지레 겁먹지 말고, 주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전진하자. 수많은 원수 마귀가 나를 에워싸도 성령님의 권능을 힘입어 골고다 언덕을 오르자. 주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걷노라면 마침내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명수 샘물을 마시리라. 그 기쁨의 환희를 바라보며 달려가자. 오늘도 원하고 간절히 바라며 기도한다. “나의 전부이신 주님, 하나님과 사랑의 일치를 이루기까지 용사와 같이 달려가게 하소서.”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