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은 마당에 있는 수돗가, 나무 그늘, 퇴비통 등 모든 게 정겹지만, 그중에 제일 맘에 드는 건 낮은 지붕이다. 작은 키로도 천장에 손이 닿아 전등 수리가 편하고, 더 낮은 쪽문은 항상 고개를 숙이게 해 참 은혜롭다. 넓고 높은 집을 원하는 이들은 시골에도 있지만 오래된 시골집은 여전히 낮고 작다. 이런 소박한 집은 촌구석으로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데, 그리 산골도 촌구석도 아닌 도시 외곽 동떨어진 마을 끝에 이 집이 있다.
어느 날 주님이 기적처럼 만나게 하셨다. 점차 은퇴가 가까워져 오고 교회에 부담을 드리기 싫어 기도하면서 한 번에 만나게 하신 곳이다. 10만원 월세였는데 그건 교회 건물 1, 2층의 사무실 화장실 청소로 낼 수 있었다. 1주일 1번의 쉬운 청소용역을 용돈이 필요한 분들에게 드리고 싶었으나 원하는 분이 없어 그냥 하게 된 것이다. 거기에 전기, 수도료는 모두 3만원이면 된다. 좁아도 낮아도, 그리고 이것저것 손 보는 불편함이 있어도 이런 조용함과 한적함을 어떻게 값으로 칠까. 무엇보다 주님과의 산책과 친밀한 대화가 무척 자연스럽다.
이곳에선 주님밖에 만날 분이 없기에 대화도 주님과 하고 사귐도 주님과 한다. 주님을 많이 사랑했던 성인들은 마땅히 주님 옆에 있다. 아내 없이 혼자 오게 될 때는 내심 더 좋다. 조금 더 불편하고 삶의 모든 게 급속히 단순화되지만-이를테면 준비 10분, 식사 10분, 그리고 밥, 국, 차와 커피가 다 한 그릇으로 해결되는-주님이 살뜰하게 만드신 풀과 나무와 하늘이 가까워 참으로 좋다.
낮은 처마와 쪽문에 여러 번 부딪치며 그동안 얼마나 교만했는지, 생각과 동기 자체가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자아의 의도가 주님 뜻을 얼마나 무시하며 합리화했는지 보게 되었다. 깊게 찢어져 오래도록 아물지 않을 땐 나을 때까지 회개가 되었다. 어떻게 그렇게 여러 번 사고가 반복될 수 있을까. 미련하기도 하지만 바닥까지 찌든 때가 그리 많은 까닭이다. 이제는 부딪히는 게 전혀 이상하지도 당혹스럽지도 않다. 그저 당연할 뿐이어서 웃음도 나고 감사가 넘친다. 부딪침과 동시에 교만과 아집의 죄가 떠오르니 성령께서 하심을 어찌 의심할 수 있을까. 실수는 미련한 내가 하지만 긍휼은 주님이 베푸신다.
주님께서 맡기신 목회를 하며 얼마나 교만해졌고, 얼마나 제멋대로 하고, 얼마나 계산적으로 했는지….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하라. 그런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하늘에 너희의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셨는데, 사람들의 인기나 존경받으려 하고, 스스로 자긍하며 흐뭇해했던 것들이 얼마인가.
이곳에 오면 물리적으로라도 고개가 숙여지고 작아져 참으로 감사하다. 아직도 내면이 겸손하지 못해 육체부터라도 겸손케 하심이리라. 있는 그대로 잡초를 캐어 소박하게 식탁에 올리고, 적게 먹고도 주님을 많이 사랑할 수 있다면, 불편을 선물로 받아 영혼의 집을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다면, 겸손하신 주님은 기뻐하시리라.
이제는 고향냄새 나는 그리운 볏집 지붕은 찾기 어렵지만 낮고 작은 집들은 곳곳에 있다. 우리 마음속에도 있다.
박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