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길


바쁜 일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편안하고 포근합니다. 바깥일을 하고 있는 동안은 마치 그곳이 전부인 것처럼 여겨지며 분주한 하루를 보내다가 때가 되면 하던 일을 접어두고 쉼의 안식처로 향하게 됩니다. 내가 쉴 수 있는 공간과 삶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시편 기자는 인생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다고 노래합니다(시103:15). 어떤 시인은 인생을 하룻길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자기의 가야할 때를 알고 사는 사람은 이 땅에서 지혜롭게 살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루뿐이라면 이 땅에서 아마 가장 값어치 있고 좋은 일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구원을 향하여 순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미련하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보이신 확실한 약속이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합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바라보며 주목하고 있습니다(고후4:18). 이것이 믿음이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이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원을 사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오늘 하루를 잘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루를 주님과 늘 동행하며 살다가 높은 천국 올라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잠들기 직전 주님을 만나 천국에 턱걸이 하는 사는 사람도 있고, 하루를 흥청망청 기분 내키는 대로 살다가 멸망으로 떨어지는 인생도 있습니다. 하루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데 우리가 방향을 어느 쪽을 향하느냐에 따라서 영원의 삶이 결정됩니다.

『신곡』의 저자 단테는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어도 종국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한 걸음 한 걸음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걸음 한걸음에 십자가를 부여했던 맨발의 성자인 이현필 선생님은 아무리 험난하고 가파르더라도 주님의 땀방울을 보고 따라가셨고, 주님의 핏자국이 방울방울 묻어있던 그 가시밭길을 맨발로 따라가셨습니다. 피와 땀이 섞인 그분의 걸음은 천국을 향한 발걸음이 아니면 아무런 가치도 아무런 의미도 없었습니다. 잠자리도, 먹을 것도, 추위를 막을 만한 옷 한 벌도 제대로 없었지만, 그분은 눈발이 휘몰아치는 산중에서 사경을 헤매면서 이 시를 지었습니다.

“주님 가신 길이라면 태산준령 험치 않소. 방울방울 땀방울만 보고 따라 가오리다. 오 주 예수 주님이여, 천한 맘에 오시어서 밝히 갈쳐 주옵시기 꿇어 엎디어 비나이다. 주님 가신 길이라면 가시밭도 싫지 않소. 방울방울 핏방울만 보고 따라 가오리다. 주님 계신 곳이라면 바다 끝도 멀지 않소. 물결 물결 헤엄쳐서 건너가서 뵈오리다. 주님 계신 곳이라면 하늘 끝도 높지 않소. 믿음 날개 훨훨 쳐서 올라가서 뵈오리다.”

지리산 눈보라 속에서도 십자가의 노래를 부르며 통곡을 하였던 그분은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는데 생사를 걸었던 천국의 순례자였습니다. 그분은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선을 위한 싸움에 일보의 후퇴도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폐결핵의 각혈로 인해 가슴이 쥐어짜는 듯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생명의 세계, 은총의 세계를 눈으로 보는 듯이 역설해 가르쳤던 그분은 이 땅에서 순례자로서 언제나 초연하게 살아가셨습니다.

천국의 영광을 향하여 달려가는 순례자(a pilgrim)에게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림자 같은 세상 때문에 얼마나 웃고, 울고 지내는지 모릅니다. 그리워야 할 내 집, 내 집을 향하여 가는 잠시 잠깐의 지나가 버릴 시간 속에 놓여 져 있는데 말입니다. 주님이 우리 인생의 장막을 거두실 때 아무런 항변도 할 수 없이 그저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 하는 데 말입니다. 세상에서 무슨 모략을 얻어 잘 살아볼까 궁리하며 머리카락을 희게 하여도 바람에 날리듯 주님이 훅 불어버리시면 삽시간에 다 날아가 버립니다.

주님은 내 영혼이 훗날 들어가 살 집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바람과는 아랑곳하지 않고 누더기와 같은 내 육신의 집을 얼마나 더 안락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밀까? 봄이 되었으니 더 산뜻하고 아늑하게 보일까 궁리하고 있습니다. 화분을 사다놓고, 남들이 보기에 우아하고 괜찮아 보이는 집안을 가꾸고 치우기도 합니다. 그러는 사이 내 영혼의 집은 지저분하고, 고칠 것 투성이에 무엇하나 정리되어 있지 않은 어수선한 영혼이 됩니다.

하루 동안 살 집에 너무 연연하고 집착하다 막상 평생 안락하게 쉴 나의 집은 짓지도 않고, 오히려 지어놨던 것 마저 퇴락하여 부서지고 있진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근사하게 인테리어 해서 꾸며놓은 집들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서 자기 집을 잘 꾸미기 위해 꿈을 꾸며 돈을 벌어 집에 투자합니다. 이 땅에 살 동안 내 땅 한 평 없어도 나는 하늘나라 내 집 평수를 하루하루 늘려가며, 영원한 내 집 인테리어 하기에 바쁜 나날들을 보내는 믿음의 고수가 되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천국에서 각자의 집을 서로 부러워해도 이미 공사는 끝났기에 소용없습니다. 초라한 집에 장식품 하나 없는 천국의 썰렁한 짓다 만 내 집을 생각하면 ‘아차’ 싶습니다. 얼른 분발해야지. 오늘 하루의 나의 삶이 영원한 나의 삶을 결정하니 오늘도 주님과 함께 기쁘게 살아야지. 집으로 가는 길은 역시 푸근하고 마음이 넉넉해집니다. 믿음의 길 끝까지 잘 걸어가서 내 집에서 편히 쉴 날을 기대해 봅니다. 천국은 본점이요 자신은 지점이라고 했던 이성봉 목사님의 찬양소리가 어느새 귓가에 울려옵니다.

“보석성에 우리 집 낡아지는 세상 옷/ 준비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만드신/ 세마포와 흰옷이 무궁무진 하도다.”

이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