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애굽에서 불러내었노라


지난날 부끄러웠던 삶을 뒤돌아보며, 또한 걸음걸음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찬양하며 간증의 문을 열고자 합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살던 시절

저는 1976년, 대기업체인 산업건설기계업체에 취업하여 승승장구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2년 뒤인 1978년에는 방위산업업체로 정부의 지정을 받은 회사가 되어 엄청난 성장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실무과정도 거치지 않고 상위관리직에 앉게 되었습니다. 당시 교만이 하늘을 치솟아 고개만 끄덕거린다거나 좌우로 흔들어 업무 지시를 하고 못 알아들으면 혼쭐을 내는 그런 상사로 군림했었습니다. 부하직원들에게 제 별명은 ‘기브스’ 였습니다.

그러나 교활하게도 윗사람들에게는 온갖 아부를 떨며 대부분의 상사들에게 특별히 사장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이행하기 어려운 업무라도 한번 지시를 받았다 하면 몇날 며칠을 집에도 안 들어가고 또 잠을 포기하면서까지 반드시 일처리를 하곤 했습니다. 덕분에 23년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고가의 자동차와 호화 주택 등 남부러울 것 없는 윤택한 생활을 하게 되었고, 차량에 소요되는 비용은 물론 사택의 모든 비용까지도 회사에서 전적으로 지급을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잦은 국내외 출장 등을 이유로 집을 자주 비우게 되었고 손님접대를 핑계로 온갖 방탕한 죄를 범하였습니다.

곤두박질 낙지인생

이렇게 안일무사한 생활을 하던 중에 I.M.F를 맞게 되었고, 6.29선언 이후 10여년을 넘게 노동쟁의에 시달렸던 회사는 설상가상 엄청난 규모의 달러 환차손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라는 망해도 이 회사는 망할 이유가 없다’던 이 거대한 회사는 1년 뒤 1998년도 10월 30일자로 부도처리가 되면서 결국은 도산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 당시 하왕 5구역 재개발조합에서 상임감사로 있으면서 함께 개발했던 극동미라주아파트를 팔아야만 했고, 회사를 사직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산업기계대리점, 인테리어, 생식 대리점, 심지어는 강원도 정선에서 도완녀라고 이름 하는 유명한 첼로리스트와 스님이 독일 유학의 인연으로 알게 되어 결혼해 함께 살면서 된장 등을 다량으로 생산하는 곳을 찾아가서 판매제휴를 맺고 샘플을 들고 일본에 들어가 수출상담도 하는 등 보따리무역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는 것마다 거듭 거듭 실패를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개인 사업은 모두 포기하게 되었고 중소기업업체로 다니면서 전무, 상무이사 등 전전긍긍하다가 마지막에는 동네 조그마한 쌀가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고자세였던 ‘기브스’의 삶이 완전히 ‘낙지’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다시 찾은 교회 안에서

그러던 중 고교시절 동네 친구의 권유로 잠깐 다녔던 교회를 2001년 11월초부터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회사 협력업체 사장이었던 E집사님의 권유로 300여명이 출석하는 교회를 다니게 되었는데, 부천에서 서울 증산동까지 다니며 서리집사의 직분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해 두해 여러 해를 다니며 왠지 구원의 확신은커녕 지속적으로 영적고갈 상태가 이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은 풍성한데 왜 빛 된 삶은 없는 걸까? 어째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성도들이 불신자보다 더 못한 삶을 사는 걸까? 성경지식도 부족하고 신앙연륜도 짧았던 저였지만 그저 믿기만 하면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하면서 빛 된 삶은 추구하지 않는 것이 너무나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불신자들에게조차도 손가락질 받는 교회의 현실과 기복주의, 믿음만능주의, 물질만능주의로 치닫는 여러 가지 교회의 형태를 보면서 자꾸만 허탈해져 갔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제 아내가 개척하던 시절부터 섬기던 교회가 200여명으로 부흥케 되었는데, 담임목사님께서 교회의 한 자매와 이성문제로 엮이면서 교회가 풍비박산이 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큰 충격은 받은 아내는 급기야 큰 시험이 들어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영향으로 저도 교회에 대한 회의가 점차적으로 밀려왔습니다.

그 무렵 혼합곡 업체로서는 그래도 큰 회사인 농진(주)이라는 회사에 취직하여 저는 남북 농협 대리점으로 1톤 탑차를 운전하며 납품을 다녔습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네덜란드 대사로 근무 중에 있는 M집사님의 간증 테이프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분 역시 평소에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다가 주일날만 예배드리고 십일조만 하면 다 되는 줄 아는 막연한 신앙생활을 해오셨습니다. 그러다가 중국대사로 있을 때 간암말기의 사형선고를 받고 깊은 참회를 하면서 하나님께 올인 하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살려주셔서 행함이 있는 즉 빛된 삶과 인격이 있어야만 참된 믿음임을 간증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간증이 끝나고 곧이어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찬양이 흘러나왔습니다. 순간 저는 봇물이 터져 나오듯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날은 여름 장맛비가 거세게 내리치고 있었던 터라, 제 눈의 눈물과 빗줄기로 인해 도저히 운전을 감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차를 주차 해놓고, 약 3시간여 동안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2004년 8월 5일, 밤 10시. 이날은 저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밤이었습니다. 장차 멸망한 도성, 장망성을 탈출하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광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