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소 시간에 1층 도서실과 방을 정리하는데, 쌀자루가 터져서 이곳저곳에 쌀알들이 흩어져 있었다. 빗자루로 쓸어 모은 뒤 티끌과 먼지 등을 제거하고 쌀을 한 알 한 알 주우려니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었다. 성가시고 귀찮은 마음에 그냥 자잘한 쌀은 버릴까도 했지만, 어린 시절 바닥에 떨어뜨린 밥알을 버리려고 하면 “쌀 한 톨의 무게를 아느냐?”는 아버지의 훈계가 쟁쟁히 들리는 듯해 그마저도 망설여졌다. 그러다가 문득 초등학교 때 어머니가 키를 가지고 곡식 등을 까불러서 쭉정이·티끌 등의 불순물을 기가 막히게 걸러내는 것을 보고 마냥 신기해한 경험이 떠올랐다. 가끔 키를 가지고 어머니를 설핏 따라 해 보았지만, 곡식만 남도록 잘 걸러내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더구나 여러 번 키를 까부르는 게 싫증이 나서 금방 포기해 버리곤 했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난 그때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당신을 사랑하기에 죽겠습니다. 이 밖에 제게 다른 원은 없습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기 위해’라며 일생을 사랑으로 불태웠던 소화 데레사. ‘오 주여, 나의 전부여!’라며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원했던 성 프랜시스, ‘나의 혼을 빼내시고 예수님의 혼을 넣어 나로 아주 미치게 하소서.’라며 예수님만을 닮고자 했던 이용도 목사님의 생애를 읽으면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버리고 내 안에 그리스도만 남기를 간절히 갈망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실패나 고통 가운데 찾아오는 상실감, 핀잔이나 책망에 무너지고, 반복되는 광야의 무료함이나 나이와 세월에 묻혀 그 열망도 점점 식어갔고, 그리스도만 내 안에 남도록 작은 불순물들을 걸러내는 일들이 점점 성가시게 여겨졌다. 이는 더 이상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의 무게를 내 삶에 짊어지고 싶지 않은 영적 안일함과 주님에 대한 사랑이 식은 탓이었다. 요즘 나는 경건의 모양만 있을 뿐, 점점 왕바리새인이 되어가는 듯하다. 

최근 한 분의 병상 일기를 접하면서 이러한 내 삶에 깊은 도전과 울림이 되었다. ‘내가 왕바리새인입니다’라고 고백했던 허운석 선교사의 두 번째 책 『그리스도만 남을 때까지』에서 나오는 내용이다. 

그는 국내에서 사역하다가 남편 김철기 선교사님과 1991년 브라질 아마존에 파송되어 22년을 사역하며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일했다. 아마존 인디오 부족들에게 독이 든 음식을 받아먹어 중태에 빠지기도 하고, 온 가족이 독충에 물려 진물과 피고름으로 얼룩졌지만, 복음 전도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2006년 폐암 진단받은 후에도 자신에게 독을 먹인 인디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가야 한다며 다시 정글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토록 인디오를 사랑하며 복음의 열정을 불태웠지만, 폐암이 재발 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참 운도 나쁘다고 혀를 찼다. 그는 암의 고통보다 사람들의 시선이 더 고통스러웠다. 많은 사람이 아픈 그를 보며 “하나님을 위해 일평생을 헌신했으면 복을 받아야지 어째서 암에 걸리는 저주를 받았을까? 당신을 보며 어떻게 하나님을 믿겠는가? 이것은 저주이니 하나님 앞에 회개하라”라면서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곁을 떠나갔다. 목사님들조차 “아마존에 가서 그렇게 고생했는데, 하나님은 복은 못 주실망정 암을 주시다니…”하며 안타까워했다. ‘주님은 왜 병을 허락하실까? 병들면 저주이고, 건강하면 축복일까?’ 이 질문은 말기 암과 투병하며 그가 직접 들은 원망의 목소리였다. 그때 그는 욥의 삶을 묵상하면서 그 해답을 찾았다.

2010년 5월 11일의 일기이다. 병원에 안 갔다. 욥기를 읽고 있다. “음식은 땅으로부터 나오나 그 밑은 불처럼 변하였도다 그 돌에는 청옥이 있고 사금도 있으며”(욥28:5-6). 하나님이 지정하시는 때에 어린아이와 힘센 자들에게 양분을 공급하기 위해 기름졌던 땅은 오랫동안 불모의 땅이 되어야 한다. 단 하나의 생명체도 없이 불에 의해 소멸하여야만 한다. 그 땅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나의 덕도, 주님 주셨던 은사들도, 명예로움도, 나의 공로도 불의 심판으로 소멸되어야만, 나의 재료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 알게 확인될 것이 아닌가. 오직 그리스도만이 내게 남으시도록. 하나의 생명체도 남김없이 진멸되고 진멸 당해야 한다. 

그리고 2010년 6월 11일 일기에서 또 고백한다. “고통은 불이 되어 나의 모든 것을 태운다. 내 속의 모든 것을 들어 처단하시고 소멸시키신다. 주님께 받았던 은혜와 은사, 능력 안에 똬리 틀고 앉아 있는 내 자아가 분리되어 진멸할 때까지 오로지 주님만 남을 때까지. 고통에 허우적거리는 내 영혼은 주님께로 가는 속도를 높이고 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 그 어느 것도 주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그는 죽음이란 “예, 주님!”하고 나를 비워내는 것이며, 더 깊이 비워낼수록 하나님과 더 깊이 연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고통과 사투하며 그리스도만 남기 원했던 그는 2013년 9월 12일 주님의 품에 안겼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미련하고 어리석다고 조롱받기도 하고, 아무 쓸데 없는 투명 인간 취급이나 바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어떤 날들은 육체적 고통으로 낙심과 절망 속으로 깊이 빠져들기도 하고, 많은 소유물이나 가까운 사람을 잃어버려 깊은 상실감을 겪기도 한다. 때론 많은 사람에게 버림받고 외면당하며 공동체 생활의 종말인 사회적 죽음을 맛보기도 한다. 더 나아가 모든 영적인 체험들로부터 느끼던 맛과 감각도 사라지고, 지성도 어둡게, 은혜의 길도 다 끊어지는 듯한 극심한 메마름을 겪기도 한다. 처절한 고통 가운데 모두에게 잊힌 욥처럼 누구도 동정하는 사람이 없고, 하나님조차 자신을 버린 듯한 깊은 내면의 어두운 밤이 오랫동안 휘몰아치기도 한다. 이는 내 안의 모든 불순물을 하나하나 진멸하고 태워서 그리스도만 남기고자 함이다. 

그러기에 어떤 이름으로 찾아오는 고통과 시련이든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잃어서는 안된다. 주님 안에서 찾아오는 질병과 가난과 고난은 결코 저주가 아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안배요 축복이요 선물이다. 우리는 잘 살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잘 죽기 위해 주님을 믿는 것이다. 

바실리아 쉴링크는 말한다. “내 말을 믿으십시오. 누구든지 천국의 영광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칠흑같이 어두운 단계를 지나며 고통스러운 실망을 견디어 내야 합니다. 그런 정신적인 암흑기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분한테서 멀리 떨어져 미궁 속으로 빠져 도무지 그분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누구든지 영원토록 천국의 향취를 맛보고자 하는 이는 그의 죄로 인해서 찾아오는 암흑 같은 고통을 일생 몇 차례나 견뎌 내야 합니다.” 

저주로 여겨졌던 십자가를 통해 부활의 길이 열렸다. 흠과 티와 점이 없는 거룩한 사람으로, 내 안에 그리스도만 남기까지 우리는 수많은 고통의 터널을 지나가야 한다. 우리는 도저히 납득 할 수 없을 때라도 “나의 아버지, 난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당신을 믿습니다.”라며 전진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십자가는 그 어떤 것도 가치 있다. 십자가 사랑의 무게를 아는 자는 고통을 결코 성가시거나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고통 안에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가 담겨 있다. 이 땅에서의 고난은 하늘나라의 빛난 보석이요 큰 상급이다. 그리스도만 남는 날까지 십자가 앞에 굳건히 설 때 나는 죽고 생명의 부활로 나아오리라.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