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닦이로 불린 김정하 목사, 세상을 光 내다
목사가 왜 구두 닦지? 한 켤레에 2000원 받아 저개발국 아이들 후원, 병으로 말도 못하게되자 단골들이 후원금 보태
'사랑의 쌀독'도 마련, 누구든 가져갈 수 있어… 쌀 20㎏짜리 120포대 저소득층에 전해져
- 성남 샬롬교회 문 앞 '사랑의 쌀독'. 연 2400㎏의 쌀이 배고픈 이에게 전달되는 통로다.
20평 남짓한 예배당 안, 접이식 의자에 띄엄띄엄 앉은 교인 10여명이 웃음을 터트리며 박수를 쳤다. 얼굴이 새빨개진 젊은 남성이 쑥스러운 듯 잠깐 일어나 목례를 했다. 경기도 성남시 단대동의 대로변 상가 건물 3층 샬롬교회. 지난 1일 새해 첫 예배를 드리는 이 교회 안은 가족들이 모인 명절 고향집 같았다. 예배 인도를 맡은 최미애(43) 전도사가 말했다. "그리고 여러분, 새해에도 잊지 말고 담임목사님의 치유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주변에서는 이 교회 김정하(53) 목사를 '구두닦이 목사'로 불렀다. 생계도 꾸리기 어려운 개척교회 목회를 하면서 김 목사는 2010년 초까지 3년간 구두통을 들고 주변을 돌면서 한 켤레에 2000원을 받고 구두를 닦았다. 부르키나파소·에콰도르 등 저개발국가 아이들 7명을 후원할 한 달 31만5000원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교회 앞에는 뚜껑에 '필요할 땐 누구든 와서 얼마든지 퍼 가세요'라는 글귀가 적힌 '사랑의 쌀독'도 놓여 있다. 한 병원의 후원으로 1년에 20㎏짜리 쌀 120포대가 이 쌀독을 통해 저소득층에게 전해진다.
그러던 2010년 초 김 목사는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다. '근위축성측색경화증', 근육에 신호를 보내는 기능이 정지되고, 신체 기능이 멈추면서 결국 호흡도 끊겨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이제 말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 김 목사는 강대상 옆 대형 TV에 설교 내용을 띄워 놓고 설교를 했다. '아, 어, 으' 외에는 들리지 않는 설교였다. 밥 먹는 것부터 생리 현상까지 모두 부인 최미희(49)씨가 돕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상태다.
◇부인만 알아듣는 '루게릭 방언'
김 목사의 '루게릭 방언(方言·성령의 인도로 외국이나 다른 지방의 말을 하는 것)'을 '통역'할 수 있는 사람도 부인뿐이다. 지금도 어려운 삶이지만 김 목사의 평생 고생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어렸을 때 갈라선 부모는 그를 강원도 삼척 할머니에게 맡겼고, 중학교 졸업 뒤 객지생활이 시작됐다. 공장 공원, 양복점 점원, 커튼가게 기사, 건축현장 막노동….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9년 만에 야간고를, 8년 만에 방통대 중문과를 졸업했다. 교회는 1987년 부인과 결혼하면서 나가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 손잡고 교회 가는 가족들이 그렇게 부러웠어요. 가족이 생기면 제일 먼저 해 보고 싶었지요."
건강식품 대리점을 하며 얻은 안정도 잠시, IMF가 덮쳤다. 1998년 초 아들·딸까지 가족 넷이 고향 삼척으로 돌아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버려진 산골 흙집에서 살았다. "군부대 짬밥을 받아다 개를 기르면서 그 속의 생선 토막을 건져 씻어 먹던 시절"이었다. 삼척의 한 교회에서 관리집사 일도 했다. 그의 신앙심과 전도 열정을 눈여겨본 주변 사람들이 2003년 그를 경기도 광주의 한 신학대학에 편입시켰다.
- 1일 경기도 성남시 단대동의 샬롬교회에서 부인 최미희씨가 휠체어에 앉은 남편 김정하 목사의 손을 잡고 웃고 있다. 루게릭병에 걸린 김 목사의 몸은 점점 말라가지만, 그를 통해 가난한 나라의 더 많은 아이들이 도움을 받게 됐다. /이태훈 기자
◇"도움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
2006년 10월, 그는 교회를 개척했다. 작은 교회 전도사로 받던 월급, 사택도 내려놓은 것. 당시 고등학생이던 아들딸과 네 식구가 상가 옥탑방과 예배당 안에 스티로폼을 깔고 자는 생활이 시작됐다. 그러자 주일예배엔 혼자 사는 노인들, 노숙인이 된 실직자, 알코올 중독자, 소년소녀 가장 등 "주님의 손길이 더 꼭 필요한 사람들"이 찾아왔다. 작은 변화들이 시작됐다.
남편이 계단에서 실족사한 뒤 매일 소주 3병씩 마셨던 알코올 중독 A집사는 지금은 술을 완전히 끊고 직장도 다닌다. B씨 부부는 임신 중 검사에서 '다운증후군'이라는 결과가 나오자 낙태를 하려 했다. 하지만 "장애를 갖고 태어나면 우리가 키워주겠다"는 김 목사 부부의 말에 낳은 아이는 지금 세 살, 지극히 정상이다. 혼전 임신으로 낙태할 생각도 했던 C집사는 아이 아빠와 결혼, 부부가 중·고등부 교사로 봉사하고 있다.
그렇게 교인이 40~50명쯤으로 늘어나던 재작년 초, 김 목사는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다. 더 이상 구두닦이도 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단골로 구두 닦던 손님들이 후원금을 보태기 시작했다. 김 목사는 작년에만 2500만원을 추가로 저개발국 아동 후원에 보탰다. "병원비와 약값에 쓰라고 돈을 보내주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루게릭병은 치료약도 없고 저는 병원도 안 가니까요. 하나님이 저를 통해 더 필요한 사람들에게 흘려보내신다고 생각하지요."
◇"남은 생은 덤… 내일 걱정 안해"
루게릭병 환자는 통상 길어야 5년을 산다. 김 목사에게는 시간이 얼마 안 남았을 수도 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물에 빠지고, 전기에 감전되고, 연탄가스에 중독되며 죽을 고비를 7번쯤 넘겼다. 지금 내게 남은 시간은 덤이니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쓰시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김 목사가 입을 움직였다. 그의 말을 부인이 다시 옮겼다. "죽은 뒤까지 아내와 자식 걱정하면 그게 천국이냐고 하시네요. 지금까지도 그랬는데 다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시는 거라고."
- 퍼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