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박의 시대  

어느 기사에 강박증 가진 현대인들을 진단해 놓았는데,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향한 삶과 너무나 흡사하여 고민해 보게 된다. 강박은 남의 뜻을 무리하게 내리누르거나 자기 뜻에 억지로 따르게 함, 혹은 어떤 생각이나 감정에 사로잡혀 심리적으로 심하게 압박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일종의 아집적인 증상으로, 자기주장에 맞지 않거나 환경이나 상황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을 못 견뎌 하는 불안한 증세를 지칭할 수 있다. 거기다 내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나 관계가 발생하면 더 힘겨워지는 것이다.

현대의 많은 사람이 강박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약간의 강박증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심한 강박증은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고통을 주는데 강박장애는 불안장애의 하나로, 반복적이고 원하지 않는 강박적 사고와 강박적 행동을 특징으로 하는 정신질환으로 분류된다. 주 증상으로는 잦은 손 씻기, 숫자 세기, 확인하기, 청소하기 등과 같은 행동을 반복적으로 함으로써, 강박적 사고를 막거나 그 생각을 머리에서 지우려고 하는 경우가 흔히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일시적인 편안함을 제공할 뿐 결과적으로 불안을 증가시키고 점점 더 강박적으로 행동하게 한다는 것이다.


강박장애 환자들은 종종 순서나 규칙성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고, 불필요한 물건들을 버리지 못하고 쌓아 놓는 경우가 흔히 나타나며, 실제로 강박증이 심할 경우 꼭 해야 하는 중요한 일들을 못하게 되고, 쓸데없는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다 쓰게 된다고 한다. 학생인 경우는 공부에 몰입하지 못하고 집중력이 사라지게 되어 성적이 점점 떨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강박증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선은 자라온 환경적 영향이다. 너무 성급하게 결론 내거나 판단하는 부모로 인해 미숙한 행동이나 잘못에 관대하게 여김 받지 못하고 자라온 경우가 있다. 학대나 폭력의 경우, 비난을 많이 받고 자란 경우에도 강박증을 키우게 된다고 한다. 

대부분의 교육적 테두리인 가정이나 학교, 사회, 신앙적 집단인 교회에서도 우리는 늘 빠르게 변화되고 반듯한 사람이 되길 강요받는다. 공부도 잘해야 하고, 직장에서도 빨리 적응해야 하고, 교회에서도 빨리 신앙이 자라야 한다고 배운다. 빠른 친구들이, 동료들이, 대우받고 인정받는다. 그것을 보는 나는 그렇지 않을 때 불안한 상황들이 펼쳐진다. 비난이 올 수도 있고, 비교를 당하기도 한다. 스스로 못 견디는 불안이 생겨나기도 한다. 


인내의 시간 

이러한 강박은 자기 자신을 강박적으로 만들어 몰아세우게 되는데, 신앙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강박증이 심해지면 우울증도 함께 나타난다고 하는데, 신앙인들도 마찬가지다. 신앙적 우울증은 영적생활 전반에서 나태하고 게을러지거나 의욕이 사라지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주님이 말씀하신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모습이 되는 것이다. 


지난주일, 우리 교회 5살 아이가 화가 잔뜩 나서 억울함을 토로했다. 이유는, 목사님이 간식을 나눠주셨는데 자신은 한 개를, 누나는 두 개를 줬다는 것이다. 모두에게 한 개씩 주는 것을 봤던 어떤 분이 그건 너의 오해라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이에 다른 집사님이 한 개씩 주는 것을 나도 봤다고 또 증언하자 더는 안 되겠는지 갑자기 좀 떨어진 의자 한쪽으로 가서 앉아 있다. 그러면서 “마음을 진정할 시간이 필요해요.”라고 말한다. 그러더니 자신만의 억울함과 답답함을 삭이기 위해 혼자서 씩씩거리며 잠시의 시간을 보낸다. 옆에 있던 목사님이 “언제 끝나?”라고 물었더니, 그런 말도 하지 말라고 하면서 혼자 시간을 좀 더 갖더니 “이제 됐어요.”라며 웃는다. 5살 아이가 진정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나름의 방법으로 인내하는 모습이 너무나 대견하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분명 성령님께서 도와주셨으리라 믿는다.       

 히브리서는 믿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5-39).


하나님은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주셨다. 담대함을 버리지 말고 큰 상을 얻기 위하여 인내가 필요하다고 하신다. 인내해야 할 이유는 더 구체적이다. 잠시 잠깐 후면 지체하지 않고 오실 그 분, 우리의 사랑이신 예수님을 위해서다. 우리의 결국은 그 예수님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영혼 구원하는 기쁨으로 믿음을 가진 자 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삶의 목표이고, 삶의 여정이 그래서 즐겁고 기뻐야 한다. 


우리가 이 땅에서 때론 강박에 빠지고 급기야 우울함으로까지 가는 이유는, 주님 때문이어야 하는데 엉뚱하게도 주님 아닌 것이 채워지지 않아서다. 하나님이 전부가 되는 것보다 이 땅에서 조금 더 잘 살고 싶은 욕망이, 조금 더 높아지고 싶은 명예가 우리를 휘몰아치게 한다. 선한 명분을 가득 앞세운 어두운 욕심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둔갑하여 어둠을 불러올 때가 많다. 나의 어둠이 우리가 속한 가정, 교회, 공동체를 어둡게 만들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나 하나의 어둠이 결국 전체를 어둡게 할 수 있으니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내가 인내하면 나와 함께하는 전체가 인내하게 되고, 내가 시험에 들면 전체가 시험에 드는 것이다. 


행복한 약속 

미국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에는 단기 수도원 체험의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기다리는 지원자들이 넘쳐난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이 나이가 많고 세상에서 부와 명예를 누렸던 사람들인데,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내 삶은 공허하고 허무할 뿐입니다. 세상의 명예와 부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것을 얻어도 나는 늘 영적인 갈망을 느낍니다.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가요? 어디에 있나요?” 

놀랍게도 이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프로그램을 마친 후에 아예 그곳에 들어가 살기로 작정한다고 한다. 왜 사회적으로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은 저들이 굳이 말년에 와서 세속을 떠나 단순한 삶을 추구하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이는 그들이 “성공하면 행복할 것이다”라는 커트라인을 정해 놓고 살다가, 결국 “그게 아니다”라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성공’이라는 신기루를 좇으며 치열하게 살아왔는데 그것이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음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1960년 후반 미국 의사들은 삶의 불행을 일종의 질병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들이 불행을 치료하기 위해 개발한 약이 바로 신경정신물질, 항우울제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슬픈 환자를 상담하고 위로를 건네는 의사들은 거의 없다. 의사들은 삶의 불행을 단순히 병으로 여기고, 항우울제를 처방함으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지시한다. 가짜 행복을 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답답한 시간을 살아냈다. 모세도 기나긴 날들을 이스라엘 백성들과 견뎌왔다. 요셉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서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냈다. 바울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답답하고 어려운 시간을 견뎌낸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약속은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 약속은 언젠가 이루어지는 먼 미래의 소망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인내를 주셨고 그 인내로 결국 구원에 이른다고 하셨다. 인내는 약속을 향한 소망의 시간이면서 사랑의 수고다. 주님은 인내를 성령의 열매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날마다 소망으로 익어가는 사람들이다. 약속의 하나님을 믿고 인내하는 시간은, 바로 익은열매로 나아가는 시간이다. 그 행복을 무엇과도 바꾸지 말아야 한다.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