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학생에게 질문을 하였다. “만약 사람을 선발한다면 어떤 사람을 뽑겠니?” 잠시 고민을 하더니 “성실한 사람이요.”라고 하였다. 학생의 마음에도 성실을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로 여기는 답변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일꾼 선발 기준에도 ‘성실’이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과연 난 하나님께서 흡족할 만한 성실한 일꾼으로 살아왔는지, 빛 된 진리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감격과 열심과 성실로 내게 맡겨진 사역을 순간순간 감당해 왔는지 되짚어 보게 되었다. 벌써 긴 시간이 흘렀다. 한결같은 마음은 많이 퇴색된 듯하다.

누구나 처음 시작하는 마음은 결단이다.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다. 성실과 열정으로 임하기 마련이다. 첫 사역을 시작할 때처럼 처음의 마음을 잃지 않고 간직한다면 계속 성실하게 사역하며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신영복의 「처음처럼」에 나오는 글이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 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가는끊임없는 시작입니다.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일’을 하루하루 성실히 반복한다면 분명 우리의 인격과 삶의 질에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처음 시작할 때와 달리 오랜 시간이 지나면 하는 일에 싫증이나 권태로움을 느낀다. 혹은 경험과 지식, 체면과 위신, 권위 등을 내세우며 처음의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처음의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 주님도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며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2:4-5)고 말씀하셨는가 보다.

크리스천에게 수많은 처음이란 결국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며,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사도바울처럼 날마다 죽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광야 길을 걷다보면 숱한 난관과 부딪히고 그때마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내면서 마음을 굳세게 하지만, 단호한 결심 또한 쉽게 무너지는 일이 많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자신이 하는 일들을 아예 놓아버리거나 성실의 끈을 놓아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실패하고 낙심하고 넘어질 때마다 우리를 강력하게 붙드는 끈은 십자가이다.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묵상할 때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갈 수 있다.

돈 보스코의 어머니 마르게리타는 오라토리오의 어머니로서 수많은 고아들과 청소년들의 음식과 세탁봉사를 하며 지냈다. 1850년 어느 날 마르게리타는 그동안 참고 있던 불평과 불만을 아들에게 털어놓았다.

 "요한! 이제 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죽도록 고생했지만 보답은커녕 누구 하나 알아주지도 않는구나. 아이들은 걸핏하면 밭에 들어가 채소들을 짓밟아 놓고 널어놓은 빨래를 떨어뜨려 흙투성이로 만들지 않나, 옷은 하루가 멀다 하고 빨아야 하고 서랍에 넣어둔 셔츠를 말도 없이 가져가단 말이야. 이제 도저히 안 되겠다. 요한! 나 베키의 집으로 가야겠어. 이젠 나도 여생을 조용히 지내고 싶구나.

돈 보스코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어머니를 보다가 벽에 걸린 십자가로 눈길을 돌렸다. 어머니도 십자가를 쳐다보았다. 주름진 어머니의 볼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 네가 옳다.” 그러곤 다시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으로 갔다. 돈 보스코는 회상록에서 말한다. “그 후 어머니는 한 번도 불평하는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우리에게 권면한다.

“당신이 성실하면 거짓된 친구들과 참된 적을 만날 것입니다. 그래도 사랑하십시오.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 받을 것입니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십시오. 당신이 여러 해 동안 만든 것이 하룻밤에 무너질지 모릅니다. 그래도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성공한 사람이 되라 부르지 않고, 성실한 자 되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몽당연필, 그것이 바로 나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연필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불완전한 도구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십니다. 나는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실함을 위해 기도합니다. 바쁘고 성실하게 살면서 불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살아가면서 장애물에 직면하게 되면 그것은 신이 내려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기쁜 마음으로 풀어 보세요.
마귀는 주변에 적들을 포진해 놓고 우리가 처음의 열심과 성실을 잃어버리도록 수많은 덫을 놓는다. 우리가 순수하고 정직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부단히 애쓰고 노력할지라도 이웃들로부터 비방과 조롱과 모욕을 당할 때가 있다. 우리가 성실하게 여러 해 동안 힘껏 쌓아 올려놓은 것들이 하룻밤에 무너질 일도 생길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적들과 장애물이 있을지라도 그 난관을 용감하게 뚫고 우리가 전진해 나가길 하나님은 원하신다. 고통이 반복되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무미건조하고 지루해도, 아무런 대가가 주어지지 않아도 여전히 주님 한 분만 바라보며 그 자리에 성실히 머물러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우리 주님처럼, 한결같이 처음의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은 찾고 계신다. 어떤 위치나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묵묵히 감당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참된 일꾼이다. 헛된 명예와 성공을 좇다가 처음의 순수한 사랑을 버리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자.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6:34). 내일 일을 염려하다가 오늘 내가 해야 할 성실의 과제들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과거의 고통과 장래의 근심에만 머물러 있으면 우리는 오늘 하루하루를 주님 앞에서 성실하게 살아갈 수 없다. ‘아침마다 새롭고 주의 성실이 크심"(3:23)을 묵상하며, 주님 앞에 하루하루 성실하게 서자

잠언 기자는 말한다.
“낯을 찡그리고 살면 세월이 괴롭고 마음이 편하면 하루하루가 잔치기분이다”(15:5). 낯을 찡그리고 원망불평하며 세월을 헛되이 낭비하지 말자. 하루하루를 처음처럼 주님 앞에 즐거운 마음으로 성실하게 나아가자. 그러면 우리의 하루하루가 잔치가 되리라.
하루하루 불평하고 원망하며 살아가는 것만큼 헛된 일은 없다. 낭비되는 삶이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인정하고 감사하며 성실하게 어제와 같이 오늘도 살자. 하나님과 같이 동행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든 날들은 매일이 잔치 날이 되는 것이다.

죽지 못해 산다는 말들을 하는 불신자들도 있고, 어쩌면 신자들도 버티는 삶이 있을 수 있다. 성경적이지 않은 삶이다. 하나님이 주신 삶은 성실해야 한다. 그것이 주님이 주신 삶에 대한 보답이다. 성실로 옷 입은 삶의 최후는 하나님의 상급과 직결된다. ‘이 하루도 성실하게 하소서, 이 하루도 진실하게 하소서.’라고 고백하는 찬양의 가사가 오늘 하루, 일 년, 죽음에 이르는 그날까지 주의 앞에서 가득 채워지길 기도한다.
주의 성실과 의로 나를 채워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