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분노가 어찌 함이냐


분노의 시대

얼마 전 국민이 경악한 사건이 일어났다. 단순한 서비스 불만으로 말다툼이 있었는데, 잔혹하게 흉기를 사용해 살인을 저지른 강서구 PC방 사건이다. 분노조절장애자의 '' 사건이었지만 화를 참지 못해 우발적으로 저지른 흉악성이 충격적이었다. 갈수록 화를 참지 못하고 벌이는 폭행, 살인. 강도, 강간 등이 빈번해지고 있다. 거기에 가해자의 연령도 현저히 낮아지고 있다. 그만큼 이 사회에 마음의 병을 지니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는 증거다. 마음속에 분노의 화살을 쌓아 놓고 있다가 작은 기회만 주어져도 참지 못하고 쏘아대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여론은 사형을 실시하라, 법을 강화하라외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사회가 치유되고 회복 될까. 그들이 왜 그런 마음의 를 품게 됐는지는 별 관심이 없고 결과에 무섭도록 냉정하다. 물론 심판을 받아야 할 일이나 점점 거대해져 가는 범죄의 파도를 그저 단죄만하는 여론들에도 타인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넘쳐남을 볼 수 있다. 갈수록 이 시대는 경쟁, 도태, 분노, 혐오, 미움, 이기심, 정죄, 판단, 공격과 방어로 채워져 가는 것 같다. 이러한 단어들이 가득 채워진 사회에서 우린 얼마나 살 수 있을까. 사회가 병들다 못해 죽어가고 있다. 독처럼, 분노가 퍼지고 있고 미움과 정죄가 빗발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

궁극적으로 죄인인 인간임을 우리는 지금 똑똑히 목도하고 있다. 왜곡되어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은 가치관들이 팽배하여 이기심만 가득하다. 배려, 사랑, 존중, 희생, 섬김과 나눔은 옛날이야기처럼 점점 멀어져만 간다. 이기면 살고 지면 죽는 승자와 패자만 있고, 사람을 재산의 축적 정도에 따라 등급으로 나누기도 한다. 자극적이고 감정적인 방송이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장악하고, 자기와 의견이 맞지 않으면 ''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반대자에게 인신공격을 퍼붓는 사회가 지금의 우리가 사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우리가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모두가 기회만 주어지면 우르르 화를 내고 있는 이 거대한 분노의 상황에서, 자신을 죽이고 남을 죽이는 일은 이제 더 빈번해질 것이다. 누가 어떻게 바꿔나갈 것인가.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분노는 한마디로 영혼의 오염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분노 이해

그리스도인들도 분노한다. 구약과 신약의 수많은 인물들도 언제나 분노하면서 자신을 성숙시켜 나갔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보면서 자신의 옳지 못한 부분에 대해 돌이켰던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스도인이 분노에 대해 올바른 이해와 정립을 할 때 사회와 시대의 가치관을 바로 세워주는 등불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분노에 대해 정의해 주는 논문이 있어 발췌하여 참고하고자 한다.

성경에서도 예수님께서 성전을 더럽히는 이들을 향해 의분하시는 모습을 보이셨다. 분노란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감정 중의 하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고자 노력하다보면 분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하는지 혼란스럽다. 개인적 사회적인 삶에서 일어나는 불합리함 앞에서 타당하게 분노를 표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이 부정적인 것처럼 느껴지고, 자신 또한 인격적으로 미성숙하게 비춰지는 것 같아 오히려 걱정과 망설임이 앞선다. 하지만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감정 중의 하나인 분노는 참는다고 사라지는 것도, 잘 다스린다고 해서 영원히 일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분노를 두고서, 자신을 방해하는 요소나 발전에 불필요한 장애물로 받아들여 끊임없이 억압하고, 외면하는 것으로만 대하는 상황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분노하는 것은 마치 미성숙하게 비춰지거나 자기성찰이 부족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 그리스도인들에 비해 소극적인 입장을 취할 때가 많다. 그간 분노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하여 죄의 영역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짙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분노는 긍정과 부정이라는 이분법적 차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분노가 일어나는 내면의 자리에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초대했을 때 분노의 영적인 차원이라는 새로운 면모를 마주하기 때문이다.

구약의 인물들은 분노의 자리에서 인간적인 방식으로 이를 해결하려하기 보다는 신앙인으로서의 자세를 무엇보다 중요시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한 모범으로 직접 분노의 희생물이 되었던 그 자리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분노를 분노가 아닌 사랑으로 승화시키셨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분노로 인한 고통 중에서 오히려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분에게 되돌아가는 은총의 선물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분노는 더 이상 신앙인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방해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분노가 지니고 있는 본연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을 더욱 적극적으로 찾을 수 있도록 재촉하는 사랑에로의 초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집중하라

마음속에 분노나 미움의 그림자만 나타나도 부끄러워하고 철저하게 참회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고의적으로 잘못을 했거나 실수를 범하여 자기에게 크고 작은 손해가 생겼을 때 지배를 받아 분노나 화를 내면서도 의분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이 범한 죄악을 선한 것으로 정당화하는 가운데 위선적인 생활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마음과 행실을 스스로 정당화하지 말고 철저히 성찰하며 깊은 참회생활을 해야만 한다. 거지 성자 라브르가 말씀한 바와 같이 철저한 성찰과 진실한 통회와 자기를 고치려는 완전한 결심이 있을 때 영적으로 높은 경지를 향하여 빠르게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철저하게 극복하기 위해서는 손해나 자기희생 및 고난을 감내할 각오를 가져야 한다. 범죄 하기 쉬운 환경이 이어질 때, 현재의 생활환경 가운데서 시험풍파를 당할 때, 이기는 훈련을 충실히 하면서 하나님의 초대에 순종하여 응답한다면 큰 유익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따르는 유일한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잘못되었거나 맘 상한 일이 발생하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화가 난다. 고통스럽거나 약간의 손해가 추가되면 분노는 더욱 거세어진다. 잠언 29:11은 우리에게 말한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하느니라."

우리는 몇 년 전에 행해진 나쁜 일에도 분노하며 폭발 할 수 있는 죄인이다. 나를 불쾌하게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은 결코 잊지 못한다. 분노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불쾌감을 줄 때, 내가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되, 같은 방식으로 응답하지 않아야 이길 수 있다. 저주, 모욕적인 말, 욕설이나 짜증의 상황에서 얼른 벗어나야 보복에 유혹 당하지 않을 수 있다. 화를 내며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에베소서 426-27절은 말한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어느 연구 결과에 보면, 하루 동안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잠자는 동안 뇌에 고착되어 깨어 난 후에 더 많이 기억하게 된다고 한다. 성경대로 용서하라.

상처와 공격에 집중하면 결코 더 나아질 수 없다. 나를 괴물로 만들 뿐이지 예수님을 닮게 할 수 없다. 우리가 그 범죄에 집중한다면, 곧 부정적으로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에 집중한다면, 곧 우리는 희망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잘못된 것에 집중하는 대신에, 하나님께 집중하라. 고린도후서 318절은 그렇게 할 때 변화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날을 소망하는 오늘, 내가 왜 분노하는지, 왜 짜증이 나는지 가만히 내 속에 들어가 보라. 어떤 경우에도 우리 주님은 겸손하고 온유하셨다.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