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의 시대마다 교회의 밝은 등불 역할을 하며, 맑은 수원지를 공급한 성화(聖化)된 성도들이 있다. 사도들, 교부들, 성 안토니를 비롯한 프랜시스, 도미니코, 마틴 루터, 칼빈, 존 웨슬리, 허드슨 테일러 등. 이분들은 이 땅에 살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엡4:13)에 이르기까지 하나 같이 한순간도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았다.  

조나단 에드워드(1703-1758)도 그러한 분 중에 대표적인 분이시다. 그는 출애굽 이후 가장 먼저 인생의 목표를 명확하게 정하였다. 성도다운 성도가 되는 것과 지상 최고의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었다. 아직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1723년 1월 14일, 인생의 좌우명을 만들고는 결심하였다. “어떤 순간에도 모든 측면에서 인격의 어떤 부분이나 어떤 환경에서도 언제나 성도다운 참 빛을 비추며, 탁월하고 사랑스럽게 행동하는 참으로 완벽한 성도가 세상에 단 한 명 있다면, 내가 그 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내 힘껏 노력하고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할 것이다.” 그는 이 결단을 항구히 지키고자 끊임없이 결심하고 또 결심하였다. 그리고 “내가 죽게 되었을 그 일을 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고 바라는 것처럼 그렇게 살라.”고 했다. 


그는 같은 시간 안에서 어떤 일을 할 때 산만한 태도와 게으른 자세로 하느냐 아니면 집중해서 부지런히 하느냐에 따라서 그 능력의 차이가 크게 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조금의 자투리 시간도 낭비하지 않았고, 음식 먹는 시간까지도 절제하며 소식을 하셨다. 날마다 성무 일과표를 철저히 지키며 점검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또한 매일 뿐 아니라 매주, 매달, 매해 시간 관리에 대한 정기적인 평가를 했다. 그냥 내 방식대로 사는 것과 성무 일과표를 정하여 영성 생활을 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거룩한 삶이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나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는 불타는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순전한 복음의 법칙에 따라 살려고 부단히 노력했고, 언제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고자 철저히 애썼다. 그의 생각은 늘 ‘어떻게 하면 내가 좀 더 거룩하게 살고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그는 밤낮으로 이 질문을 던지며, 영적 싸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의 삶의 특징 가운데 또 하나는 종말론적 의식이었다. 그러기에 자신의 마지막을 순간순간 의식하며 주님을 주목하면서 시간 관리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아마도 그처럼 총체적으로 철저하게, 지속으로 시간을 관리하며 철저하게 살았던 분도 드물 것이다. 이것이 그가 성숙하고 거룩한 사람이 되었던 비결 중에 한가지 비결이었다. 지혜롭고 성숙한 사람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시간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시간을 영혼에 유익한 곳에 사용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부지런히 아껴서 사용한다. 

“한순간의 시간을 절대로 낭비하지 말고 가능한 한 최대로 유익하게 사용하라.” 시간은 금보다 더 소중하다는 말이 있듯, 이 세상에서의 우리 삶은 단 한 번뿐이다. 영원한 내세의 삶과 비교해 볼 때 이 세상은 아침에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시간이다.

목표를 세운 뒤 ‘거룩함을 추구하는 열정’을 계속 불태우며, 오롯이 주님에게만 집중하며, 시간을 보냈던 에드워드에 비해 내 삶이 너무나 부끄럽다. 얼마나 게으르고 나태하고 악하게 살았는지 가슴이 먹먹해 차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허투루 보낸 지난 시간과 시시하게 대충대충 살았던 삶들이 너무 억울하고 괴로워 가슴을 찢으며 밤늦게까지 울었다. 죄인 중에 괴수, 벌레와 짐승만도 못한 더러운 인간, 허례와 위선의 탈을 쓰고 배를 신으로 삼고, 기생충 같은 나태한 삶이 안타까워 가슴을 치며 회개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인생의 지혜는 삶의 유한성과 일시성을 깨닫고, 이 세상의 모든 삶을 영원을 위한 삶의 준비로서 영원을 대비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영원에 비추어 현재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참 지혜이다. 미래를 현재에 미리 앞당겨서 살아가는 것, 천국과 지옥에 이미 갔다 온 사람처럼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죽음과 하나님의 최후 심판대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종말 의식을 가지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종말 의식이 바로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와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살아야 할 동기부여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심판대의 빛 아래서 행했으며, 종말이 금방 임할 것처럼 마지막 때라는 의식 속에서 행하셨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7-10).


나의 영적 스승님은 주님이 오실 마지막 때를 기다리며 누구보다도 시간 관리에 철저하셨다. 항상 성무 일과에 맞추어 관상 생활하며 수도적인 삶을 사셨다. 특수한 몸의 조건도 있었지만, 며칠에 한 번 하시는 양치질도 다른 사람에 비해 세배나 빠르게 끝내셨다. 제자들이 왜 그렇게 빨리 끝내시냐고 여쭈어보면, 하나님 앞에서 약속드린 시간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우리가 광야 연단을 마치고 빠르게 성장하려면 성무일과를 정해서 철저히 지켜나갈 때,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성무일과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씀해주셨다. 

“첫째는 성무일과는 생활의 모든 언행 심사에 영적인 의미와 목표를 분명하게 합니다. 둘째는 성화와 완덕을 향해 노력하는 성도들에게 지속적이며 균형 잡힌 영성 생활하는 데 유익이 됩니다. 셋째는 시간 낭비, 우유부단, 의무태만 등의 악습에 빠지지 않도록 큰 도움을 줍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내가 게으름을 피웠는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았는지를 질문해 보라. 또한 매주 말, 매월 말, 매년 말에는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과 세상과 마귀와 치열한 영적 싸움을 피 흘리기까지 했다. 

신앙이 성장하면 할수록 실제적인 면에서는 그만큼 죄를 작게 범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더 죄에 대한 깊은 의식과 회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것은 큰 역설이다. 양심에 무디고 대충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자기의 큰 죄를 아무것도 아닌 양 살아간다. 반면 거룩함을 추구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사소한 죄까지도 더 큰 죄로 여기며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아파한다. 주님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자기의 허물과 오점을 보지 못하며, 빛으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기의 허물과 죄를 더 분명히 밝히 보는 이치와 같다. 우리가 주님과 가까워질수록 죄에 대해 더 민감해지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철저하게 살아가기 위해 애를 쓴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세상의 부와 편안한 삶을 거부하고 예수님처럼 불편하게 사셨다. 언제나 마음을 세상으로부터 분리하고, 천국에만 눈을 고정하고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살아가기를 힘쓰셨다.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인내를 배우는 복된 기회로 삼았다. 그러면서 신앙적인 실천에 몰두함으로써 내 생각을 고통에서 떠나게 했다. 또한 마음을 단련하여 영혼을 성숙게 하는 고통이 복음의 본질이라고 하였다. 고통은 비록 현재는 불편해 보이지만, 이를 통해 성화된다면 무엇을 염려할 것이 있겠는가. 

이 밤 다시 조나단 에드워처럼, 나의 스승님처럼, 그리고 거룩한 길로 나아갔던 많은 믿음의 어른들처럼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주님께 내 삶을 드리자.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며 주님의 시간 속으로, 거룩함을 향해 지속해서 달려가길 목마른 사슴처럼 간절히 갈망해 본다.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