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 높아 다니게 하라
죽어 나흘이 되어 악취 풍기는 나사로를 예수님은 살려내셨다. “나사로야 나오너라.”(요11:43) 이 한 마디에 생명이 소생됐다. 하나님은 지금도 모든 곳에서 죽은 자들을 벌떡벌떡 살려내시는 작업을 하신다. 그러나 손발은 여전히 묶인 채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요11:44)  죄수나 포로처럼 속박당했다. 싱싱한 생명으로 살아났는데 꽁꽁 묶고 있는 그 기형적인 포승줄은 대체 무엇인가? 눈은 수건에 가려져 볼 수 없고 손발은 묶여져 옥죄임을 받는다. 사람이 숨을 거두면 죽은 자들을 묶는 장례법이 있다. 염습(殮襲)이다. 생명을 살리신 예수님은 재차 명령하신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당신은 무엇에 묶여 있는가? 예수님의 생명으로 풋풋하게 숨 쉴 하늘에 소속된 영광스러운 성도인데, 무덤 속의 관습으로 칙칙하게 살아가고만 있다. “감사는 천국이요 비교는 지옥”이란 말이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비교하셔서 예수님의 하신 일과 내가 한 일을 셈하셨다면 이 큰 죄악을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었겠는가? 비교의 저울들로 인간의 마음은 황폐해졌다.
필자도 젊었을 적에 벅찬 일을 당했다. 엄밀히 계산했을 때 그들은 10가지를 잘못했다면 나의 잘못은 하나 정도였다. 그저 당한 것이다. 억울함이 분노로 이어졌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셨다. “네가 나를 섭섭하게 했으니, 네가 섭섭한 일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하신다. 내가 옳으니 내 편이 되어주기를 바랐으나, 오히려 주님 편이 되라고 가혹하게 고집하셨다. 바로 거기에 해결이 있었다. 나의 방법은 너와 나를 비교하는 수평(水平)적 방법이었지만 하늘나라 방법은 수직(垂直)이었다. 실컷 울고 회개했다. 그 눈물에 평화가 고이기 시작했다. 적대적인 그들은 일 년 안에 모두 내 품으로 돌아와 충성된 일꾼들이 되었다. 내가 주님과 화해하니, 하나님은 그들을 친구로 만드셨다. 그 후로 나는 이것을 내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았다. 목회에도 적용했다. 수평적 해결방법은 정의를 내세운 마귀의 파멸 수법이다.
당신을 묶고 있는 포승줄은 분명 질길 것이나, 마귀의 조롱을 받으며 바득바득 처참한 모습으로 살 수는 없다. 그 괴로움은 자신이 잘 안다. 밉고 서글퍼도, 억울해도, 어둠을 과감하게 밀어내야 한다. 영혼이 죽으면 삶은 지옥이 된다. 사탄은 성도를 죽이지 못한다. 상처만 낸다. 성도를 죽이는 것은 성도인 자신이다. “왕자여 어찌하여 나날이 이렇게 파리하여 가느뇨?”(삼하13:4) 왕의 아들이 풀이 죽어서는 안 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시고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느니라.”(골1:13)
고귀한 가문에 속한 사랑의 아들이여! 마지막 날, 하나님은 공개적인 설명회를 열 것이다. 사건을 하나님께 접수하고 그날까지만 기다려라. 이제 당장 새벽을 깨워라. 새벽은 어둠을 퇴출하는 힘이 있다. 당신의 알람 장치가 혹시 기능을 잃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더 다급하다. 당신은 세계로 뛰쳐나가 마귀에 묶여있는 인류를 풀어줄 사명자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살려 달라고, 어서 와서 천국으로 인도해 달라고, 영혼의 절규가 우주의 함성으로 들려온다.
“여호와께서 내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로다.”(시18:28)

이동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