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지 욕망

옛날 동양의 어느 황제가 궁전의 발코니에 앉아 해안선을 지나다니는 많은 배들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배가 많다는 것은 나라가 번영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곁에 서 있던 신하에게 넌지시 물었다. “일 년 동안 우리 항구를 드나드는 배가 모두 몇 척이나 된다고 생각하시오?” 그랬더니 신하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 척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황제는 솟구치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이 건방진 신하가 면전에서 자신을 우롱하다니.

“어찌하여 그대는 내게 감히 그런 대답을 하는가!” 황제가 소리쳤다. “지금 내 눈 앞에만 해도 백 척이 넘는데, 일 년 동안 고작 네 척 밖에 드나들지 않는다고?

신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네 척뿐입니다. ‘모험을 구하는 욕망’과 ‘흥미를 찾는 욕망’과 ‘명예를 항해하는 마음’과 마지막으로 ‘돈을 좇는 욕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저 바다를 항해하는 모든 배들의 궁극적인 이름입니다. 저 배들이 각각 어떤 이름을 새겨 넣고 다니든지 간에 말입니다.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욕망은 사실 이 네 가지뿐입니다.

우리도 자신의 이름을 새겨 놓은 사명이라는 각자의 배를 가지고 있다. 혹 우리도 어리석은 황제처럼 수많은 업적과 규모와 드러난 수치에 웃고 울지 않는가. 자신이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먼 것도 모른 채 나는 부자요 부요하다고 스스로 자긍하는 라오디게아 목회자처럼, 정욕의 바다(세상) 한 복판에 서 있지는 않은가. 나의 지나온 과거의 항로를 되짚어보고, 현재 어디를 항해하고 있는지 깊이 성찰해보자.

“모험을 구하는 욕망”의 덫에 걸려 하나님보다는 내 야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윽박지르며 자기 열심에 빠져있지는 않았는지, “흥미를 찾는 욕망”의 빙산에 걸려 어려운 일이 닥치거나 부담스럽고 꺼려지는 일이 주어지면 흥미가 떨어져 쉽게 배의 닻줄을 놓아버리지는 않았는지, “명예를 항해하는 마음”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일들은 가볍게 치부하고 돋보이는 일들에만 열심을 내지는 않았는지, 혹은 “돈을 좇는 욕망”에 사로잡혀 이 땅에서의 성공과 평안과 안락한 삶을 추구하지는 않았는지. 해골이 그려진 흑색 깃발을 달고 세상의 바다를 배회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욕망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고 했다.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일을 한 후 도리어 버림받을까 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피멍이 날 정도로 자신을 철저히 복종시켰던 거룩한 삶을 본받자.

우리의 종착지 천국, 소원의 항구(107:30)에 다다르기 위해 끊임없이 예수님의 보혈로 정욕으로 금이 가고 구멍 난 배를 구석구석 깨끗이 닦고 수리하자. 거친 파도 휘몰아치더라도 오직 주님의 나라를 위해 밝은 빛의 돛을 달고 힘차게 항해하자. 세상의 물결을 거스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