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을 새롭게 하자

소명(召命)이란

소명이란 ‘불러 명령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선택된 자에게 바로 오늘 이 시간의 결단을 요구하며, 거절하면 죄의 근거가 되는 가차 없는 진지성을 내포한다. 또한 소명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위치’(station)라고 할 수도 있다. 소명의 일차적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과 그의 나라의 봉사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살기 원하신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협동하여 봉사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가운데 그가 하라고 하신 일을 봉사해야만 한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항상 개인적인 인격 속에서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상황과 직업이 어떻든 관계없이 우리에게 부딪혀 온다. 이런 소명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만남 속에서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개의치 않으시고 항상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인 결단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거룩”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행하던 어둠의 행실을 벗고, 밝은 빛이신 예수님의 인격을 본받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부르신다(엡5:8-13). 그래서 죄악과 정욕으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거룩한 빛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시려고 빛의 열매를 맺도록 훈련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목적은 광야훈련을 통해 거룩함에 흠이 없는 천국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소명

아브라함은 어느 날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는 소명을 받았다. 익숙한 환경과 사람들로부터 떠나 낯선 길을 떠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육신적으로는 괴로운 것이었으나 바랄 수 없는 중에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나아갔다.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하나님께서는 오늘을 사는 우리도 부르고 계신다. 그 부르심은 아브라함이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난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의(요일2:15-16)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그곳에서 빠져나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혀지지 않을지라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나아가야 한다.

이 세상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잠깐 머무는 정거장일 뿐이다. 그러므로 순간순간 우리는 영적 광야를 통과하는 나그네와 순례자임을 늘 인식해야 한다.

비록 이 길이 사막의 모래바람을 가르며 가는 좁은 길일지라도, 혈혈 단신으로 걷는 외로운 길일지라도 종착점을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이 지상적인 가나안을 목표로 그의 순례 행각을 수행했던 것과 같은 정신으로, 천상적인 가나안을 목표로 우리의 순례 행각을 수행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소명을 수행한다는 것은 단순한 시적 환상이 아니라 십자가의 주님과 같은 수치와 매 맞음, 어두움과 고통을 경험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소명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노아는 당대 많은 사람 가운데서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오랫동안 방주를 준비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거대한 방주를 짓고 그 안에 각종 동물들을 살게 하고 또한 동물을 먹일 많은 음식까지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며 “이젠 방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셨다. 이때 노아는 “안 됩니다. 나는 건초를 더 모아야 해요. 옥수수와 과실을 더 저장해야 해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준비하던 것을 즉시 끝내고 그의 피난처에 주님의 명령을 따라 들어갔다.

우리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도 “방주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예수님께로 나아오라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분명하고도 최종적으로 우리 자신을 예수님께 맡기라는 말씀이다.

그것은 마치 노아가 자기 자신을 방주에 맡기고 이젠 가라앉아도 방주 안이요, 헤엄을 쳐도 방주 안이요, 살아도 방주 안이요, 죽어도 방주 안이듯, 모든 것을 방주에 맡긴 것처럼 우리 자신을 예수님께 맡기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바로 그것이다. 우리 자신과 또 자신에 관한 모든 문제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맡겨야 한다. 생각하고 결심하고 준비하며 분주하던 것들을 이제는 끝내고 곧 바로 “방주 안으로 들어오라.”는 명령에 순종해야만 하는 것이다.

소명 받는 자의 두려움 그리고 위로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모든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연약함을 느낀다. 자신의 영향력과 경험이 보잘것없으며 불안정하다고 느낀다. 자신의 무지와 무가치함을 느낀다. 상대방의 평가기준을 의식하며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소명을 주실 때 반드시 위로도 함께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무지, 무가치성,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사역에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신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도 주신다. 그러므로 소명 받는 자는 다만 하나님만 의지하면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저주받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무익한 것은 재난을 만난다는 경고의 말씀이다. 온갖 기회가 제공되어도 끝내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더 이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찍히고 말 것이다. 심리학자 폴 투니어는 인생의 삶에 세 가지의 요소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 인간은 그에게 부과된 하나님의 요청에 응답하기 위해 살며 일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인간은 명상을 통해 그 일이 무엇인가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기대하시는 참다운 자신의 직분을 찾아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사람의 소명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과업 즉 소명이 있다. 그것은 평신도의 삶일 수도 있고, 목회자의 삶일 수도 있다. 가정에서의 삶일 수도 있고, 수도자의 삶일 수도 있다. 그것은 또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일일 수도 있으며 아무도 알지 못할 일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을 수행하는 것은 영광의 길이요, 그 일을 거부하는 것은 재난의 길이라는 점이다.

루터는 말했다. “나는 나의 소명과 자신을 분간하지 않을 수 없다. 나 자신은 보잘것없는 존재다. 그러나 나의 소명은 손으로 만질 수조차 없는 것이다. 그 누구도 자기 자신에 관하여 교만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그의 소명만큼은 하나님의 영광에 맞먹을 만큼 높이어 기려야 한다.”

나는 나의 소명에 충실하고 있는가?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