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거스르는 곳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도다

버스를 기다리다보면 청소년들의 대화를 듣게 되는데 가끔 낯이 뜨겁다. 친구를 부를 때도, 대화 도중에도 거친 욕설이 쉴 새 없이 튀어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청소년이 73.4퍼센트가 매일 욕을 한다는 기사가 피부로 와 닿는 순간이다.

주일 오후 청소년들에게 언어의 향기에 관한 설교를 하면서 욕을 하냐고 물어보았더니 당연히 한다고 한다. “학급 대부분 아이들이 욕을 해요. 욕을 안 하면 대화가 안 돼요.” “친구들이 욕을 하더라도 크리스천은 달라야 하지 않겠니? 빛 된 언어를 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단다.”라고 하자, 욕을 전혀 하지 않고 학교에서 지내는 것은 쉽지 않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청소년들이 욕을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습관이 돼서, 친구들과 친근감을 갖기 위해서, 말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남들이 만만하게 볼까봐 등. 놀라운 사실은 텔레비전이나 인터넷보다 친구를 통해서 가장 많은 욕설을 배운다고 한다. 청소년들은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소외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한다. 그러다보니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욕을 하게 되고, 시대적 문화의 흐름에도 민감할 수밖에 없다.

현 시대를 보면 아이의 말에 한편으로는 공감이 되면서도 씁쓸하다. 나 역시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과 별반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는 강력한 예수님의 선언 앞에서 소금 절인 배추마냥 영적인 힘이 없다. 빛 된 삶으로 이 시대를 박차고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그리하지 못한다.

마틴 루터의 생가에 쓰인 글이다. “시대를 거스르는 곳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도다.” 그리스도인은 이 시대를 역류해가는 가는 사람들이다.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하늘에 속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셔서 어둠을 몰아내셨던 주님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질타를 가해도 오직 하나님의 뜻만 불처럼 토해냈던 예레미야처럼, 죽음을 각오하며 믿음의 정절을 지켰던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조차도 세상의 달콤한 행복에 젖어 진리를 거스르며 어둠을 좇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가치관과 행복을 좇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말한다.

인생의 목적은 행복을 얻는 데 있다. 기독교는 행복을 가져다준다. 때문에 기독교는 좋은 종교다. 이렇게 기독교를 전파하는 목사가 있다. 또 그렇게 믿는 신자가 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들이 선전하는 것과 상반되기 때문에 그들은 실망하고 기독교를 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기독교는 현세에서 행복을 주지 않는다. 도리어 행복을 파괴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는 결코 그분의 제자들에게 행복을 약속하지 않았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10:34).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참된 신앙에는 환난이 뒤따른다. 행복은 따르지 않는다. 이것은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 것으로, 참된 신자라면 누구나 체험하는 사실이다. 인생의 목적은 행복을 얻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데 있다. 행복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알면 불행도 행복이다. 그분을 모르면 행복도 불행이다.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을 알게 되면 인간 세상을 초월하고 불행은 개의치 않게 된다. 신앙으로 이 세상의 행복에 전혀 무관심한 자가 되기 바란다. 신자는 신앙을 얘기하는 사람이지 행복을 논하는 사람이 아니다. 기독교 신자로서 욕심을 얘기한다는 것, 남의 행복을 부러워한다는 것, 자기 불행을 한탄한다는 것 모두 다 수치다. 구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이다. 그분을 아는 것이 진짜 행복이다.”

이삭 목사님을 통해 들려준 북한의 한 할아버지 일화가 이 땅의 행복을 추구하며 안일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거룩한 경종이 된다.

한 노인이 밥을 준다고 하니 바지를 걷어 올리고 징검다리를 하나 둘 조심조심 건너왔다. 조선족이 큰 소리로 김 씨 아저씨 저녁 자시러 오시라고 해라.” 외치니 세 명의 젊은 친구들도 함께 건너왔다. 젊은 친구라야 60대 후반이었다. 79세 할아버지의 신발은 다 헤어졌고, 옷은 남루했고 추워보였다. 얼굴은 검다 못해 병색이 완연했다. 하지만 전혀 비굴하지 않았고 오히려 거룩함과 경외함이 느껴졌다. 왜 탈출하려고 하냐는 질문에 찬송이나 마음 놓고 한번 불러보고 싶어서.”라고 하였다.

언제 나오실 수 있으셔요?” “빠를수록 좋지 않을까요?” 순간 머리로는 이미 65명의 탈출자들이라는 말을 들었던 터여서 비용을 계산하고 있었다. 방법과 이동할 길목들을 구상하고 있었다. 중국의 공안들을 어떻게 설득시켜야 할지, 어느 산을 넘어야 할지, 아이들도 있다지 않은가?’ 긴 생각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찬송 한 번 마음 놓고 불러보고 싶다는데 무슨 설명을 붙여야 할까? “도와 드리겠습니다.” 수많은 어려움이 예상됐지만 한 마디로 결론을 내렸다.

그때 노인이 그래도 결정하기 전에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그리고는 일어나 울타리 밖으로 걸어 나가고 계셨다. 10분이나 걸렸을까? 노인이 돌아오셨다. 나의 눈은 노인의 얼굴에 멈추었다. 그 거친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먹을 쥐고는 몸을 곧게 세우셨다.

내가 하나님께 물었소이다. 저 미국에서 온 이 목사가 우릴 돕겠다는데 따라 갈까요? 라고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능력이 없어서 너희들을 북조선에 남겨두는지 아느냐?’고 하시는 군요.” 서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노인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목사님, 매 맞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랍니다. 굶는 것도 하나님의 목적이랍니다. 혹시 기회가 주어지면 남조선으로 가서 찬송이라도 실컷 부르고 집에 가고자 했는데이 땅에 남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니.”

그리스도를 따라 걷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사람들이 외면하는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걷을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을 가려면 세상과는 부딪힐 수밖에 없다. 고통, 희생, 손해, 반목과 핍박과 궁핍은 필연적으로 따른다. 세상의 것을 슬쩍 맛보려고 하면 주님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세상에 불을 지르려면 온갖 모욕과 멸시 속에서 온 몸이 찢기고 녹아내렸던 예수님처럼, 자신의 삶은 물론 세상에 집착하는 모든 것들은 불 태워버려야 한다. 결국은 이 땅의 모든 것은 물론 생명을 포기할지라도 용감하게 순교의 자리에까지 뛰어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영원히 썩지 아니할 천국을 소망하는 자다. 고통 받을 각오 없이는, 불편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결코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얻지 못한다. 불편하다고 불행한 것은 아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왕따 당하는 것을 두려워 말고 이 시대를 거슬러 십자가의 길로 오르도록 하자. 세상이 우리를 바보로 여겨도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달리자. 세상을 거스르는 곳에 주님이 가까이 계시다.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