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원하시면


바벨론 강둑, 그 위에 주저앉아 울었노라,

거기 눈물이 땅을 적시었노라.

사랑하는 시온아, 너를 못 잊어 하며

즐겁던 네 추억에 눈물 더욱 서러웠노라.

내 안에 죽으며 있었노라 네 안에 다만 숨 쉬었노라.

너로 인해 스스로 죽어 가고 너로 인해 또다시 살아나고

귀양 땅 이방인들이 희희낙락 즐길 적에

철없이 기뻐 날뜀을 어리둥절 보노라니

내 부르던 시온 노래를 그들이 물어 이르더라.

남의 땅이라 더욱더 서러운 것을 어이하랴.

시온에 두고 온 내 즐거움을 나로서 어이 노래하리.

-십자가의 성 요한

위의 시는 1567년 십자가의 요한이 마음을 드러낸 고백이다.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를 만나게 되고 개혁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반대파(완화 가르멜회)의 수도원에 잡혀 혹독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햇볕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감옥 같은 골방에서 욕설은 물론 때로는 회초리로 어깨를 두들겨 맞기도 하면서 짐승처럼 남이 먹다 남긴 음식을 먹어야 했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처절한 순간들을 보내면서 그는 처절한 고통을 글로 남겼다.

눈물로 탄식하며 고약한 하나님을 언급할 수밖에 없었던 시온의 사람 요한. 인간에게 주어져야 할 최소한의 즐거움마저 남김없이 다 빼앗기고도 살아남은 자신의 처지를 그는 죽었으면서 또한 살아 숨 쉰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를 살게 한 힘은 시온, 그의 고향은 주님이 인도해주시고 힘을 주시던 그리운 곳이었다. 그가 지향하는 곳 곧,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거룩한 그 곳을 말한다.

너로 인해 스스로 죽어 가고 너로 인해 또다시 살아나고. 비참함만이 전부인 곳에 거한다 해도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할 자신의 처지를 눈물로 서러워하지만, 기꺼이 견디며 이겨간다는 고백이다.

후대에 위대한 성인(聖人)으로 불리고 있지만 당시 사람이었고 완덕을 향해 올라가던 과정에 있었을 그가 겪은 끝없는 절망은 사람이기를 포기하고 싶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래서 성경은 결과가 위대한 사람들의 과정을 이기었다, 라고 말하는 것이리라.

원하시면

하나님의 뜻이 아무리 명확해도 내가 작아지고 초라해지고 비참해지면 머뭇거리고 망설이면서 고민을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보다 그 하나님의 뜻을 가늠하고 판단할 사람들 눈치를 더 보게 된다. 누가 그러더냐, 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사는 우리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가끔 내가 그랬는데, 라는 답답함을 호소하고 싶으실 지도 모른다.

꽃이 피고 지는 일과 낮이 되고 밤이 되는 일, 바람이 임의로 부는 일들을 우리는 자연의 섭리라고 여기고 인정하고 순응한다. 하지만 그 자연을 만드신 분의 오묘하신 일을 대할 때는 어쩜 그리도 냉철하고 비판적이고 뛰어난 판단력을 지닌 사람으로 바뀌는 지 모를 일이다. 내 것에 뿐 아니라 다른 이의 삶에도 말로 생각으로 개입을 하면서 그들의 하나님을 자로 재어 줄로 그어주고 새로운 정의를 내려 주기도 하니 말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 그 어떤 일에도 하나님의 계획하신 뜻이 있음을 받아들이고 맡기는 맘이라면 얼마나 충만한 화평이 넘쳐날까.

어느 마을에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있었다. 그가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간청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원한다.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즉시 그의 살갗이 보드라워지고, 나병이 깨끗이 사라졌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온 동네에 말하고 다니지 마라.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가서 네 나은 몸을 조용히 보여라. 네 말이 아니라 깨끗해져서 순종하는 네 삶이 내가 한 일을 증거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일을 자기 혼자에게만 담아 둘 수 없었다. 소문이 곧 퍼져 나갔다. 어느새 큰 무리가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들었다.

우리가 잘 아는 복음서에서 나병 걸린 이를 고쳐주신 예수님의 이야기이다. 고통과 절박한 삶 속에서 모두에게 소외되었지만 예수님 앞에 서니 용기가 났던 사람. 그는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고 다시 함께 하고픈 이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가면서 용기를 내었지만 그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던 말은 원하시면, 이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는 맡김의 말이 예수님의 마음에 콕, 진심어린 소중한 고백으로 들어가 박혔던 것이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길 원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의 필요를 따라 거기에 합당한 은혜와 자비를 더하셔서 채워주시는 인자하신 분이시다. 주님에게 더 이상의 의심이 없을만한 믿음을 드려보자. 원하시는 대로 하시라고.

좋으실 대로

난 이 말이 참 좋다. 가장 편하고 의지되고 안심이 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닌 주님이 좋으실 대로 무언가를 행하신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거워 할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안심이 되는 많은 말들이 있지만 하나님이 좋으실 대로 하는 일만큼 안심되는 일이 또 있을까. 실수하지 않는 분, 미리 아시고 계획하시고 준비하시는 분, 변함없으신 분, 여기에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시는 능력 많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인도자가 되시기에 우리는 그분의 행하심과 이끄심이 그저 좋은 피조물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좋으실 대로’ 라고 기도할 때가 제일 편안하고 안심이 된다. 피조물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갈수록 느끼기 때문이다. 뭔가 그럴듯한 일도 어느 순간 훅, 꺼져 버릴 때가 있고 불안하고 불편한 환경과 사람들이 다가와도 좋으실 대로 한마디면 편안해진다.

그저 한숨만 나오는 세상과 시대적 흐름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불안케 하고 수면위로 속속 떠오르는 주님의 예언적인 징조와 메시지가 눈에 들어오는 요즘이다.

주님을 철저하게 바라보고 신뢰한다 해도 은근 슬쩍 뭔가 의지할 것들을 둘러보게 된다. 주님이 하시는 일들이 ‘경고’ 라면 주님은 그것이 좋으신 것이다. 필요하신 일이니 좋으신 것이다.

그것이 결국 거룩함과 경건함으로 들어가는 디딤돌이 될 것이므로 주님은 그 일보다 그것을 통해 변화되고 새로워질 우리들에게 더 관심이 있고 기대가 있으신 분이시다. 그러니 사람이라서 연약함과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명분화 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생기면 우리는 울고 주님은 담담하신 것이다. 어느 때엔 침묵처럼 말이 없으시기도 하다. 주님의 계획은 주님이 좋으신 대로 하시면 결국 가장 좋은 길과 섭리로 완성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고 의지며 맡김이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도 내어주신 분이다. 그 눈물겨운, 죽음보다 강한 사랑보다 더 큰 것이 있을까. 이젠 그 사랑을 죽도록 고마워하고 기뻐하면서 전하는 일만 우리에게 남았다. 이 땅에서 주어진 삶 동안은 좋으실 대로 내어 드리면서 내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가면 되는 것이다. 시대적 메시지에는 옷깃을 여미고 기도하면서, 환경적인 요인이나 사람으로 인한 괴로움은 넘어 가고 지나보내면서 말이다. 더 이상의 확증이 무엇이 필요할까. 죽음으로 주신 사랑이 있는데 말이다.

이제 더 이상 무엇을 주실 것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떻게 하실 것인지, 누구를 통해, 왜, 그러면 언제, 등등의 의문과 궁금증, 조바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좋으실 대로’ 창고를 두드리지 않아야 한다. 그 창고에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 적절한 각종 영양식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공급되기 위해 충분히 준비되어 있고, 주님은 알아서 나눠 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내게 조금 더디 오는 일들, 갑자기 오는 사건들, 어쩌다 마주치듯 신기하게 오는 일들,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들, 혹은 너무나 당연한 일들까지 그것은 주님의 마음이다. 그냥 받고 인정하고 겸손과 감사의 고개를 끄덕이자. 주님이 원하시면 나도 좋고 기쁘니까. 행복하니까.

이순화 전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