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부를 위하여

c1a6b8f1_bef8c0bd17.png학교 놀이터에서 종이컵 하나를 가지고 모래장난을 하는 아이들의 얼굴에 행복이 가득하다. 놀이에 흠뻑 빠진 주일학교 아이들을 어렵사리 설득하여 교회로 데려가는데 한 여자 아이가 따라왔다. “아줌마, 그 컵 제 거예요. 돌려주세요.” “혹 괜찮다면 여기 동생에게 양보해 줄 수 있겠니? 동생도 가지고 놀고 싶은가 봐! 대신 초콜릿 줄게.” “안 주셔도 괜찮아요. 그 컵은 제게 정말 꼭 필요한 거란 말이에요. 대신 이것 가지세요.” 작은 종이컵 하나이건만 아이는 깜짝 놀라며 나에게 달려온 것이다. 컵을 돌려주자 굉장히 소중한 것을 다시 찾은 듯 아이의 얼굴이 금방 환해졌다. 아이들은 보통 한 가지 좋아하는 게 있으면 그 하나만으로도 매우 행복해한다.

토마스 머튼은 말했다. “행복이란 정확하게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에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것을 찾아내면 나머지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할 것이다. 그때에는 거룩한 역설에 따라 한 가지 필요한 것과 함께 다른 모든 것이 주어질 것이다.”

진주를 발견한 농부가 기뻐 뛰며 집과 재산을 다 팔아 진주가 묻힌 밭을 샀다는 성경이야기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우리는 한 가지 가장 필요한 것을 얻기보다는 부자 청년처럼 세상의 많은 것들로 인해 머뭇거리며 참된 행복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지난 달 어느 분에게 작은 선물을 세 개 받았다. 예수님 성화 사진 한 장과 소화 테레사의 어린 시절 사진과 작은 엽서 한 장이었다. 큰 선물은 아니었지만 소박한 친절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런데 소화 테레사의 어린 시절 사진을 손에 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오로지 예수님 한 분만을 갈망하며 14살 어린 나이에 수도원 문을 두드렸던 삶에 매료되어 책에 줄을 그으며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제 마음이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하나님에 대한 깊은 사랑의 갈증을 느꼈습니다. 어느 날 밤 문득 예수님에 대한 저의 애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또 어느 나라에서나 예수님이 사랑 받으시기를 원하는 이 간절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몰라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지옥에 있는 사람에게서는 조금도 사랑을 못 받으신다는 생각에, 지옥에서도 하나님이 사랑받으시게 하기 위해서 제가 지옥에 가도 좋습니다.’라고. 사랑할 때는 바보 같은 말도 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때에 내 안에도 거룩한 갈망이 타올랐다. 예수님을 생각만 해도 좋아서 히죽히죽 바보처럼 혼자서 웃기도 하였다. 갈색 모포로 덮인 침대, 걸상, 모래시계, 흰 벽에 나무 십자가, 창에 보이는 것은 슬레이트 지붕과 하늘뿐인 작은 수실이었지만 그녀는 모든 게 멋지게 느껴졌다. 세상과 단절된 그 안에서 깊은 기쁨으로 다음의 말을 되풀이했다. ‘나는 영구히 여기 있으리라.

조그마한 수실 벽, 갈색 나무 십자가에 달려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나도 같은 고백을 드렸다. “저도 주님 한 분만을 갈망하며 주님 한 분만을 일평생 사랑하며 여기에 머물겠습니다.”

불꽃처럼 주님만 사랑하다가 사랑으로 타 죽어가길 원하는 열망이 가득했다. 주님 한 분만 있으면 무엇 하나 부러울 게 없었다. 행여나 주님을 놓칠까봐 가슴을 치기도 하고, 주먹을 불끈 쥐고 허벅지를 때려가면서 주님을 찾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겨울 낙엽마냥 예수님을 향한 갈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리저리 세상의 바람에 나뒹굴고 있다. 수실 안에 책, , 자그마한 물건들은 늘어가건만 행복은 점점 사라져가는 것 같다. 주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내 마음이 조금씩 점령당해 가고 있는 탓이리라.

작은 엽서 안에 쓰인 글귀다. “영광도 없다. 희열도, 안전도 없다. 자유도, 기쁨도 없다. 명예도, 위로도 없다. 학식도, 지식도, 휴식도 없다. 원함이 없을수록 더욱 많이 가진다.”

곧잘 사람의 영광과 사역의 희열과 세상의 위로와 쉼을 찾다가 가장 소중한 한 가지, 예수님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선한 명분 아래 원함은 많아지지만, 정작 예수님은 뒷전일 때가 많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말한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자신을 두면 부족함이 없다.” 하나님의 일은 가지는 것에 있지 않다. 그 어떤 일도 예수님을 찾는 일이 아니라면 잃어버린 시간들이다. 그것이 설령 하나님을 위한 사역일지라도 말이다.

나 역시 그랬다. 사역에 매몰되어 헛된 명예욕을 좇다가 정작 주님에 대한 사랑은 점점 식어갔다. 기도 소리도 땅으로 점점 꺼져버렸다. 사역이 잘 안 풀리고 어려우면 세상의 위로를 찾으면서 그것을 정당화했다. ‘이쯤은 주님도 이해해 주실 거야. 지금은 휴식도 필요하고, 위로도 필요해. 조금쯤은 자유를 누려도 괜찮아.’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이 먼저다. 다른 모든 것은 나중 일이다. 어쩌면 자신에게 그리고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 유대인처럼 우리도 자신의 탐욕을 허례와 위선으로 가린 채 돌을 들어 예수님을 내면의 성전에서 쫓아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8:59). 그것도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선한 명분 아래에서 말이다. 성화 속 예수님이 나에게 손짓하는 듯하다. 허례와 위선의 껍질을 벗어버리고 더 깊고 맑고 고요한 눈빛으로 나오라고.

모든 것을 맛보는 데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맛보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얻는 데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는 데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아는 데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갈멜의 영적 교훈처럼 오직 한 분 주님께 다다르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얻으려고도, 아무것도 되려고도 하지 않아야 한다. 한 가지 필요한 것, 예수님을 얻고자 나머지 모든 것은 포기해야 한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예언, 방언, 지식 등 부분적으로 하던 모든 것이 폐하여진다고 했다(고전13:10). 은사나 특별한 체험이 있다고 우쭐댈 일도, 사람들이 알아주는 사역을 한다고 으스대고 자긍할 일도 아니다. 성도가 많다고, 교회가 크다고, 유창한 설교를 한다고 나는 부요한 자요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만족할 일도 아니다. 일이 잘 된다고,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다고 기뻐할 일도 아니다. 오직 한 가지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그분만을 갈망하며, 좁고 협착한 길로 쉼 없이 달려가야 한다. 예수님의 생명을 내 안에 소유하기까지.

예수님의 생명이 영 속에 합일된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다. 우리는 무엇을 찾고자 달려가고 있는가. , 주님 한 분만을 갈망하는 행복자로 서 있고 싶다. 고칠 것은 고치고, 끊을 것은 끊고, 버릴 것은 버리면서.

하나님을 소유한 자는 모든 것을 소유한 자라고 하였다. 나에게 필요한 한 가지는 오직 예수님뿐이다. 나의 전부이신 예수님을 찾고자 오늘도 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련다. 주님만을 사랑하기 위하여 이 광야 길을 걷고 걸으련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만을 소유하는 그날까지 나 여기 있으리라. 오직 전부이신 주님을 위하여.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