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히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자주하신 말씀은 나를 먹으라’(6:35,50,51,53,55)는 말씀이었다. 피를 마시라고도 하셨다. 먹지 않는 자는 멸망뿐임을 강조하시며 필수적으로 먹어야 하고 예수님은 먹히시려고 오신 분임을 밝히셨다. 이 뜻을 몰랐던 종교 지도자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얼간이로 여겨 배격하였고 그래서 저들은 버림을 받았다.

아이를 잉태한 여인은 그 순간부터 뱃속 생명에게 찢기기 시작한다. 출산된 생명도 본능적으로 엄마 젖을 물어뜯어 빼앗아 먹는다. 그것이 산모의 기쁨이요 영광이요 극치의 사랑이다. 생명 탄생과 육성의 신비다.

슬픈 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손수건이 되기 위해 뻣뻣해지신 예수님의 성수(聖手), 죄인을 병든 자로 보시는 긍휼 때문에 안식일도 범하고 율법도 무시하는 파렴치한 망나니로 취급당하시는 예수님의 추락된 명예,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술꾼으로 치부 당하시는 수모를 겪을지라도 밑바닥 인생을 끌어 안으셨던 예수님은 세상에서 말하는 수준 높은 체면과 지위를 모두 박탈당하셨다. 최후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을 때에 그 몸은 짓이겨진 시신으로 내주셨고, 걸쳤던 의복까지도 빼앗긴 바가 되시었다. 단 하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다.

 


삼손처럼 정욕에 먹혀 눈알 뽑히는 비참한 일 당하기 전에, 아간처럼 물욕에 미쳐 돌무더기에 매장되기 전에, 헤롯처럼 오만에 도취되어 창자 썩어 죽기 전에, 가인처럼 질투의 포로가 되어 살인하는 악마가 되기 전에, 고라처럼 반역하다가 땅에 묻혀 몰살되기 전에 내 자신이 구원받아야 할 인류에게 먹혀야 한다.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먹혔고, 저드슨은 버마인을 위해 먹혔을 때 인류의 찬란한 등불이 되었고,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사람들에게 먹히는 선교전략으로 믿음선교의 폭발적인 열매를 맺었다. “살려고 하면 죽는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 예수님이 세우신 법칙이다. 섬기려고 오신 예수님은 처음부터 종으로 처신하셨고,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행하신 행동은 무릎 꿇고 수하 사람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겸손이었다. 초대교회는 모일 때마다 성찬식을 통하여 예수님을 먹었고 자기들도 먹혀야 될 줄 알고 거의 모두 순교당한 바 되었다.

자기 몸과 돌보는 거짓 목자에 대해 에스겔은 준엄한 책망을 퍼붓는다. “약한 것은 잘 먹여 힘을 돋우어 주어야 하고 아픈 것은 고쳐주어야 하며 상처 입은 것은 싸매주어야 하고 길 잃고 헤매는 것은 찾아 데려와야 할 터인데, 그러지 아니하고 그들을 다만 못살게 굴었을 뿐이다. 양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 온갖 야수에게 잡아먹히며 뿔뿔이 흩어졌구나”(34:4). 주님의 아픔이요 탄식이시다.

 


주 야훼가 말한다. 목자라는 것들은 나의 눈 밖에 났다. 나는 목자라는 것들을 해고시키고 내 양떼를 그 손에서 찾아내리라. 그들이 다시는 목자로서 내 양떼를 기르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양떼를 그들의 입에서 빼내어 잡아먹히지 않게 하리라”(34:10). 어찌하면 좋을까? , 주님!

이동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