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가온 예수님


두 달 전부터 헌팅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헌팅턴 병 환우회 모임이 SNS인 밴드를 통해 시작되었다. 헌팅턴 병은 4번 염색체 이상으로 뇌세포가 점점 사멸되어 몸의 신체, 정신적인 기능들이 상실되어 가는 병이다. 보통 30세 이후에 발병해서 15년 정도 지나면 사망에 이른다. 현재 치료제는 없다. 남편과 아이도 이 병으로 투병중이다.

환우회 회원으로는 서울대학교 병원 신경과 담당 교수님, 연구원, 환우들과 환우 가족 분들, 지인들이 가입했다. 회원들은 자기를 소개하는 글이나 간병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글,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주는 글을 올렸다.

밴드에 실린 글의 일부분이다.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처럼, 아주 작고 미약해 보일지라도 크고 아름다운 결실로 열매 맺으리라 확신합니다. 환우와 가족 여러분들 파이팅하시고 완쾌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시동생이 헌팅턴 병으로 투병중입니다. 3월에는 조카 보고 웃기도 하고 자기 이야기도 하고 그랬는데어제는 조카의 인사에도 눈 맞춤을 하거나 인사를 받아주는 것도 안 해주네요. 감정이 없는 사람 같아요. 정신과 진료도 같이 봐야 하는 건 아닌지 궁금해서요.”

지금 이 순간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비록 절망과 아픔, 죽음 같은 사실뿐일지라도 주님은 겨자씨만한 보잘 것 없는 사랑과 믿음에 응답하셔서 함께 이 길을 걸을 수 있는 분들을 만나게 해주신 것이라 생각한다. 주님이 주시는 소망과 생명의 씨앗을 우리 곁에 심고 정성을 다해 키워주고 계신 것이 분명하다.

공식적인 환우회 발족식이 열리기 전날, 소풍 가기 전날처럼 설레어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자리를 제공해준 병원 회의실에서 소박하게 환우회 발족식 모임이 열렸다. 참석하신 한국 희귀 재단 이사장님은 모임의 발전을 기원해 주시고 아울러 환우 가족 분들 중 유전 상담을 하실 분은 지원해 주시기로 하셨다. 서울대학교 신경과 교수님은 미국에 있는 헌팅턴 병 재단을 통해 치료제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희망을 가질 것을 부탁하셨다. 환우 가족 분들은 간병의 어려움과 애환을 나누면서 공감의 시간을 가졌다. 이루어지는 일을 통해 주님이 한 걸음 한 걸음씩 인도하고 계심을 느낀다.

언제 부턴가 나의 내면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자유 같기도 하고, 평화 같기도 하다. 주님의 임재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된 느낌이었다. 암담하고 열악한 상황에서도 언젠가부터 그들이 자비하신 주님께 특별한 사랑과 관심을 받는 작은 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그들을 더 사랑하려고 고투했던 나날들이 주님이 주고 계시는 은총임을 보게 하셨다. 그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저 헛수고 같아 그 아픔 가운데서만 주님을 찾으려고 했다. 눈이 열리고 내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투병 중에 있는 남편과 아이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남편과 아이가 낫기를 위해 드렸던 간절한 기도 속에는 질기고도 질긴 자기애와 이기심이 있었다. 그들이 치료되어야만 내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자기애가 깊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눈 뜬 장님으로 살던 나에게 주님은 말씀하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기도 가운데 들린 주님의 음성은 나의 어두운 영혼을 빛으로 인도하였다. 나의 돌봄을 간절히 원했던 남편의 바람을 외면한 채 간병의 어려움을 핑계 삼아 요양원에 입원시키려던 생각을 그 즉시 버렸다. 건강을 잃은 남편에게 최고의 행복은 내가 곁에 있어 주는 것이었다. 그 간절한 소원을 외면할 수도, 외면해서도 안 되는 것은 나에게 건강을 허락하심이 건강하지 않은 자를 돌보라는 주님의 뜻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당신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특권을 마다하고 기꺼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주님의 뜻을 버리고 나의 안락과 평안만을 추구하면서 살다가 훗날 주님 뵈올 때 미선아, 내가 너를 어떻게 사랑했느냐?’고 물으신다면 주님 얼굴을 어찌 뵈며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으랴.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에서 주님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 모든 사람을 갈라 세우실 것이다. 그리고는 주님이 정하신 기준에 따라 판결을 내리신다. 그 기준이 놀랍다. 예수님은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당신과 동일시하신다. 병들었을 때 병을 고쳐주거나 감옥에 갇혔을 때 풀어주는, 어렵고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삶에 동참해주길 바라신다. 재물이나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열려 있고 공감하는 자비로운 사랑의 마음을 원하신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25:40). 예수님은 그들 안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도움을 청하신다. 우리는 단지 사람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예수님과 관계하는 것이다.

우리가 언제 예수님을 몰라 뵈었고 언제 지나쳤는지 예수님 앞에 가면 알게 될 것이다. 심판은 진실만을 보여줄 것이다.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설 때 주님처럼 사랑 때문에, 손해 보는 낮은 삶을 선택하는 용기가 내게 있기를 소원한다.

박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