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들


 정현종 시인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이라는 시에 보면, 화자(話者)가 과거를 회상하며 후회하는 여러 가지 말들을 꺼내 놓는다.

나는 가끔 후회 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 때 그 사람이, 그 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빈 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bab8b4d9b5e5b3f4c0cc4.jpg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한 가운데 서라

트라우마(trauma)는 일반적인 의학용어로는 외상(外傷)’을 뜻하나, 심리학에서는 정신적 외상’, ‘(영구적인 정신 장애를 남기는) 충격을 말하며, 보통 후자의 경우에 한정되는 용례가 많다. 인생을 살아가는 누구나 한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트라우마를 가지지 않은 이는 없다. 어릴 적 기억으로 평생을 상처를 부여안고 살아가기도 하고, 예민하던 청소년 시절의 기억 혹은 성인이 된 후에라도 경험하고 혹은 주고받은 상처들은 마음에 상처 하나씩을 남긴다. 어떤 날 어떤 일을 하다가 문득, 어떤 사람, 어떤 사건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때 우리 반응은 대개 같거나 비슷하다. 꺼내기 싫은 기억들은 감추려 한다. 상처가 되었다는 뜻이다. 상처로 얼룩진 사람들이 대체 누구냐고, 헤아려 보려고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 주변의 모든 이들은 나로부터 시작하여 다 트라우마로 얼룩진 사람들이다. 성경의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누구하나 아무 일 없이 살다가 곱게 천국에 간 사람이 없을 정도다.

누가복음 6장에 보면 오른손 마른 사람이 나온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려고 그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시험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신다. 그의 병은 고침을 받았고 회복 되었지만 주님의 한가운데는 많은 깨달음을 주시는 구절이다.

상처로 얼룩져서 감추고 싶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들을, 콕 찝어 너는 죄인이다’, 그러니 그 죄의 한 가운데 서서 그것을 내게 내밀어라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순간이다. 엄숙하지만 부드럽고 자비하시다. 한 번씩 손 마른 자를 묵상해 본다. 얼마나 수치스럽고, 비굴한 맘도 들고 두렵고 떨렸을까. 한가운데 말고 사람들 안 보는 구석 어디서 은밀히 고쳐주시지 주님도 참. 하지만 그가 한 가운데 설 용기를 내는 순간, 예수님을 시험하던 이들의 교만과 아집과 질투가 사라졌고, 모든 어둠이 한꺼번에 물러가는 역사가 일어났다. 주님은 영광을 받으셨고 쓰임 받은 그는 회복 되었다.

 


지금 이 순간

모든 인간에겐 방어기제(防禦機制)가 있다. 하기 싫거나, 손해 볼 것 같은 일, 상처가 되었던 기억이 있거나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동으로 방어하고 싶은 행동과 말이 튀어 나온다. 거절하고 싶고 피하고 싶을 때, 그럴 듯한 이유나 변명을 늘어놓는 나를 발견할 때가 꽤 있다. 주님이 말씀하신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싫다는 뜻이다. 지금 오리를 가자고 해도 십리는커녕, 일리도 못 가 주겠다는 뜻이다. 지금 행해야 할 작은 일들 혹은 큰일들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열매를 거둘지 몰라도 일단 지금은 싫다는 것이다. 지금 거절하고, 안 하면 그만인 안일하고 나태하며 이기적인 마음. 그러다 보니 성령의 열매는 우두둑, 가을비에 낙엽 떨어지듯 다 떨어지고 만다. 열매 없는 나무로 주님 앞에 설 뿐이다. 그러니 연말이면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가련하게 자비를 구하는 현실이 되고 만다.

성화(聖化)된 성도들의 특징은 미래를 산 사람들이었다. 미래만을 바라보면 허황된 꿈을 꾼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일들이 미래를 일구는 밑거름으로 사셨던 분들이다. 천국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미래를 살다 보니 이 땅의 것에 미련을 두며 집착을 하고,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명예나, 인정에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물질도 명예도, 애정도, 혹은 세상의 쾌락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들을 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린양이 인도하든 어디든 그곳이 주님의 뜻이라면 예, 할 수 있었던 것.

천국의 기준으로 보면 이 땅의 것이 얼마나 무가치한가. 그 작고 초라하고 보잘 것 없음에 목숨을 거는 가련한 사람으로 광야 여정에서 쩔쩔매는 우리들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가치를 두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지 내가 보기에 가치 있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인기 있는 일들에 가치를 두고 마음을 두다 보면 그 가치는 곧 사라지는 안개가 된다.

천국은 미래지만 그 미래는 지금 만들어진다. 우리가 행하는 작은 일들, 말들, 작은 생각이나 표정하나까지도 주님 나라에서는 상급으로 갚아주시는 원천들이다. 지금 하는 것들이 미래를 만드는 것인데, 지금 안하고 나중에 하면 되지 뭐,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지. 나는 이것만은 못하겠어. 그 사람과만은 안하고 싶어. 이런 천국과 먼 가치들이 우리 마음의 지경을 좁히고 천국과 동떨어진 열매 없는 일에 우리 몸과 생각을 뉘이게 한다.

모든 삶의 기준은 성경이다. 그 기준대로 살면 정도로 갈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곁눈질을 하는데 있다. 누군가 무언가를 하는데 그게 좋다면 우르르. 누군가가 괜찮더라고 하면 또 우르르 기웃기웃. 정도를 걸으셨던 주님이 계시고 주님이 가신 길이 확실하게 밝혀진 성경이 있고, 빛 된 삶을 보여주며 귀감이 되셨던 믿음의 선진들과 영적 스승이 우리 앞에 계시다.

성화된 성도들은 지금 주어진 당장의 일을 하였다. 지금 가서 소유를 팔라고 하면 지금 팔러 갔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면 지금 했다. 그분들이 지금 실천한 그 지성과 결단력은, 자기를 부인하며 죽기까지 충성해야 했던 일들이기에 죄성과 애정과 욕망들이 점진적으로 정화되어 결국 성화로 갔던 것이다. 지금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우리를 성화로 가게 한다.

 


거룩하게 피워야할 모든 순간들

그때 그 일, 그 사람, 그 물건, 더 열심히 할 걸, 더 말도 하고 더 귀도 기울이고 열심히 사랑할 것을, 왜 나는 그러지 못했을까 절규하지 말고 지금 곁을 보며 후회 없이 살도록 결단하면 좋겠다. 그 모든 순간은 다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였다는 것을 추억할 그날이 있다. 그 순간이 그래서 그랬구나 깨닫게 될 날. 모든 순간이 피어날 순간이라는 기쁨.

지금 꽃봉오리들 천지인 내 주변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먼 훗날, 주님 앞에서 안타까운 모습이면 안 되지 않는가.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나에게 주어진 일들에게, 기쁘게 외쳐주자. 나를 성화로 가게 도와줄 꽃봉오리여! 내가 열심히 꽃을 피우겠습니다. 물을 주겠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나중에 나를 거룩하게 피워 줄 꽃봉오리가 될 수도 있다. 나에게 주어진 일이, 내가 열심을 내기에 따라 꽃으로 피어 향기를 발할 수 있다. 좀 더 들어주고, 나눠주고, 베풀고 감사하면서 더 열심히 물을 주는 사람이 되어 보라.

나뿐 아니라 주변과 단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될 것이다. 나를 통해 내 주변이, 단체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바뀔 수 있다.

모든 순간이 다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순간만큼 귀한 것은 없다. 지금도 내 곁에서 피어날 준비를 하는 수많은 꽃봉오리들을 보라. 가시가 있고, 악취가 나고, 주변의 꽃이 피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고, 못된 맘을 품는 것이 드러나 보이는 등, 사람이 사는 마을의 꽃봉오리들은 참 불완전하고 연약하고 어리석고 무능하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그 수많은 조건들을 주시며 나에게 말씀하신다. 너를 위해 준비한 꽃들이다. 아직은 꽃봉오리인데, 열심을 내어 거룩하게 피워보렴.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