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이 되어


신앙인에게 세상은 크게 둘로 나뉜다. 사랑해야 할 세상과 사랑치 말아야 할 세상이다. 그래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도 두 가지가 된다. 죄에 파묻혀 살아가는 방법과 죄악과 싸우며 살아가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전자는 지옥행 특급열차를 타는 것이고, 후자는 천국행 완행열차를 타는 것이다. 전자는 지옥의 시민권을 확보하려는 것이요, 후자는 천국의 시민권을 얻으려는 것이다.

지옥으로 가는 것은 비자 발급도 까다롭지 않고 중간 역의 검문검색도 심하지 않을뿐더러 관문을 통과하는 시험도 까다롭지 않다. 평소에 다져온 이기심에다, 나만을 위해 살아온 내신 성적만 있으면 무시험으로 합격이다.

반면에 천국으로 가는 길은 까다롭기 그지없다. 간이역마다 검문검색이 심하고 양심의 밝기 측정과 죄를 발견하는 시력 측정은 물론, 죄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한 땀의 양과 잘못을 뉘우친 눈물의 양을 아주 정확하고 세밀하게 체크한다. 얼마만큼이나 남을 위해 자신의 유익을 포기했는지에 대한 점검과 확인은 언제나 가슴을 조여 온다.

죄악 세상은 믿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가시밭길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숙명의 길이기도 하다. 이는 연단이라고 이름 지어진 고상한 채찍이요, 땀과 인내를 요구하는 엄청난 시련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떨어지고 넘어져, 상처를 매만져야 하는 십자가의 길이다.

주일은 그나마 교회에서 생활하니까 일단 제쳐 놓더라도 6일 동안의 세상살이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같다.

주일 예배를 통하여 듣는 설교 말씀으로는 월요일 하루를 살아가기에도 방부제 역할을 못할 때가 많다. 어떤 때는 죄성의 저기압으로 발생한 유혹의 태풍이 초속 60m로 몰아칠 땐, 몇 시간도 견디어 내지 못하는 무력함에 스스로 놀랄 때가 많다.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마18:10).

그런데 나는 어찌 했는가? 꾀죄죄하게 생긴 사람이나 장애인들을 사랑하지 못했다.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거나, 신체적으로 인격적으로 왜소한 사람들을 무시했다.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 비겁한 사람, 의무는 소홀히 하고 권리를 유난히 주장하는 사람들을 혐오했다. 내 눈에 들보는 못 보고 남 눈의 티를 보며 비판과 책망을 서슴지 않았다. 돌아보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나으니라.”(마18:6)는 말씀이 적용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물에 빠져야 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으로 큰마음 먹고 이웃에게 좋은 일 한 번 하고 나면, 은밀한 선행에 숙달이 안 되어서인지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랐다. 그런 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좀이 쑤신 나머지 옆구리 찔러 절 받는 식으로 사람들에게 넌지시 얘기라도 해야 속이 후련하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29). 이 말씀을 흉내라도 내보려고 전화 벨소리에 수화기를 들어 친절하게 내 소개를 하는데 아무 말도 없이 뚝 끊어버리는 상대방의 소행에 대해 반나절은 기분이 나쁘다. 바쁘게 전화를 해야 할 곳이 있어 안달을 하고 있을 때, 전화로 계속 잡담하고 있는 여직원을 보면 온유는 수증기처럼 증발해 버리고 만다.

한 푼이라도 절약하고픈 마음으로 값 싼 이발을 하고 나면, 싼 게 비지떡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실감하면서 머리가 다시 자랄 때까지 속상하다. 그리고 다시는 그 집에 안 가겠다는 각오도 서슴치 않는다. 또한 정직하게 살아보려고 하면 세상에 만연한 위선이 비웃고 현대판 흥부처럼 무능력자나 바보로 취급하고, 심할 때는 단세포 동물로 낙인이 찍히기도 한다. 그러나 어찌하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1:21)는 주님의 말씀은, 이 세상이 에덴동산이나 천국이 아니기에 하신 말씀이다. 어쩌면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하나님 백성을 괴롭혔던 애굽, 앗수르, 바벨론, 메데 바사, 헬라, 로마다. 싫든 좋든 엿새 동안을 세상에서 보내야 한다.

세상에 산다면 추운 겨울을 맞이하여 자아가 깨어지는 연단을 받아야 한다. 요셉같이, 이사야같이, 다니엘같이, 느헤미야같이, 열 한 제자나 사도 바울같이 살 수 있을 때 겨울을 지나 따뜻한 봄을 맞이할 것이다.

사회는 유기체들의 집합장소다. 유기체들의 유기적 관계가 바람직하게 이루어지려면 가면이나 외투를 벗어 던지고, 선악과 이전의 아담과 하와로 돌아가야 한다. 꾸미고 가꾼 겉모습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수 있는 속마음의 교류가 있어야 한다. 사회가 각박할수록 속마음은 두꺼운 외투를 몇 겹이고 껴입는다. 이 옷을 벗기려면 웬만한 불꽃으로는 어림도 없다. 되도록 많은 열을 상대방이 덥다고 느낄 때까지 전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두꺼운 외투를 벗는다.

열은 물질이 탈 때 나온다. 물질이 탄다는 것은 자신의 희생을 의미한다. 아낌없는 희생이 불꽃으로 이어질 때 투박한 외투와 가면을 벗고 마음을 드러내 보이며, 신뢰와 신의가 자리를 잡게 되어 훈훈한 사회를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두 가지 세상을 살면서 죄와 갈등으로 고민했던 사람은 마태였다. 이러한 마태에게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마태를 데리고 외딴 섬으로, 산골짜기나 무릉도원으로 데리고 가신 것이 아니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8)고 했을 때 순종하며 따라온 베드로와 합류시켰고, 사람을 낚는 어부로 세상에 보내셨다. 그 후 마태는 주님께서 인류를 위해 걸어가신 고난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갔고, 지금은 천국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사람을 낚는 어부로 세상에 보내진 사람들이다. 나로 인하여 이곳 사람들이 복을 받을 수 있도록 복의 근원이 되라고 하셨을진대, 행위에서 본을 보이지 못하면 색안경을 낀 눈을 피할 수 없고, 이로써 믿는 사람 모두를 욕 먹일 것이다.

설혹 아니꼽고 떫은 시선들이 온몸에 피부병을 일으킨다고 해도, 따돌림을 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패배자와 같은 삶이라고 느껴질지라도,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려면 남이 기피하는 일부터 묵묵히 솔선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온몸이 피곤하고 팔다리가 아프면, 아픈 팔다리가 있다는 걸 감사하면서 봄 속으로 들어가 보자.

송흥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