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며칠째 하늘이 온통 뿌연 이런 날엔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가 생각난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옥상정원을 만들고 국화를 심고 나서야 이 시의 진의를 알게 됐다. 국화는 봉오리를 맺히고 실제 꽃잎을 내기까지, 다른 꽃들보다 한 달은 족히 더 걸리는 듯하다. 올라가서 보면 아직도 그대로고 또 올라가 보면 여전히 아직도 그 모양 같다. 봉오리가 조금씩 커가지만 열리지 않는 것이다. 빛깔이 서서히 밖으로 스며 나오고 결국에 하늘이 열리는 듯, 신비가 풀리는 듯 벌어지는 모습은 영락없는 한 편의 시다. 어찌 그리 지루할 정도로 진행되는지. 정말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는기다림이다. 그래서인가 유럽에선 지금 한국의 국화꽃에 매료돼 있단다. 다른 화려한 꽃들이 다 피고 진 계절에 지금껏 견딘 세월의 이야기를 겸손히 풀어놓는 국화는 튜울립이나 벚꽃 같은 것과는 비교될 수 없다. 은은한 향기도, 점잖은 자태도, 무엇보다 못내 천천히 자신을 보이는 그 고고함이 백화와의 비교를 거부하는 것이다.

기다림은 인고의 시간이 길수록 더 소중하고, 결말은 더욱 찬란하다. 조개의 아픔이 길면 길수록 진주는 더 영롱해지는 것처럼, 어두운 땅속 굼벵이의 견디고 견딘 결말이 그 어떤 소리도 흉내 낼 수 없는 우렁찬 포효로 터지는 것처럼, 끝까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아니하고 깊은 산속에서 수백년을 참고 참은 산삼의 효능처럼.

이렇게 안개가 짙은 날에, 더구나 미세먼지까지 섞여 음울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날에도 기다림은 깊어진다. 비가 온 기억이 아스라하고 먼지가 푸석푸석 일어나는 메마른 이런 날이 여러 날 지속되면 나는 국화 봉오리 앞에 선 기다림이 된다.

높고 푸른 하늘, 눈부신 햇빛으로 적당히 덥혀진 시원한 바람, 신비가 깊어가는 옥빛의 계곡수, 빨갛게 익은 연시들의 대견스러움이 그립다. 허나 이보다 더욱 기다려지는 건 해맑은 영혼이다. 사심 없는 순진함이다. 많은 실수보다 더 많은 용서의 고백이 있고, 베풂보다 더 많이 구하는 긍휼이 있는 그런 영혼이 그립다.

오랜 세월 동안 참고 깨져 숨긴 게 없는 투명한 영혼. 보혈로 씻고 씻은 그곳에 담으시는 생명의 주님이 그립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1:12).

참고 기다린 자에게 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가 그립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8:17).

이 마른 가을에 그리움과 기다림이 함께 춤을 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