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에서 예수님 영성으로

인도의 성자 썬다 싱에게 영혼의 암흑기가 있느냐 물었을 때 없다고 응답했다.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의 첫 부인은 임종하는 순간에 감미로운 미소를 지으며 요사이 몇 년간 주님과의 사이에 구름 한 점 가린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가시밭길 선교현장에서도 주님과의 깊은 영적 친밀감 때문에 천사의 포근한 가슴을 가질 수 있었다. 부럽고 달콤한 모습들이다.

그리스도인의 고민은 영성의 핍절일 것이다. 목회자의 탈진 상태! 성령 충만이 어느덧 성질 충만으로 바뀌고 악신에 충동되어 다윗에게 단창을 던지는 사울왕의 흉측한 변덕이 바로 자신임을 발견했을 때의 그 충격과 좌절감! 그래서 충격요법을 써 보기도 한다. 기도원에 입산하여 소나무 뿌리 뽑아보기, 어마어마한 능력의 종들을 찾아가 권능을 전수받기 위해 특별안수를 세차게 눌러 받아 보기도 하고, 은사 충만으로 세기를 흔드는 부흥사의 꿈을 품고 다소 저질적이기는 하지만 야곱의 무모한 배짱을 부려보기도 하였다. 온갖 세미나에 앞 다투어 참석하고 21세기의 성장전략을 모두 습득하였지만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썰렁한 가슴을 메울 길이 없어 허우적거리고 있는 초췌한 모습은 여전하다. 반면에 항상 깨어 있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엄중한 경고를 묵살한 채, 아예 뱃심 좋게 요나의 깊은 잠에 빠져 분별력을 잃은 영적 무기력에 침몰됨은 또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예수님께로부터 배워야 한다. 예수님의 초점은 오로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유지한 점이다.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고”(6:38-39) 오셨다고 하신다. 소속을 분명히 하시었다. 그래서 내 말은 아버지의 말이라,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 나는 그의 보내신 그 아들, 다시 아버지께로 간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하나님을 아바(아빠)라 불렀고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말과 일을 한다 하셨다. 따라서 보내신 분의 뜻을 민첩히 깨닫기 위해서 극성스럽게도 간곡한 기도를 쉼 없이 드렸다. 내 뜻대로 마옵소서.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의 절규시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나 건방졌다. 선교현장과 예수님이 주인으로 계시는 교회에서도 감히 자기가 주인인 양 내 말을 감히 무시해?”하며 분한 얼굴로 씩씩거렸다. 예수님의 뜻이 묵살될 때에는 죄송스러운 눈치조차도 없었는데도.

선교는 실종된 인간 구출작전이다. 생명구원과 명품 크리스천을 만드는 것이 선교요 목회요 직분 감당 이유이다. 섬세한 부분에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랐던 예수님의 그 외골수 하나님 중심목회철학, 선교철학으로 지체 말고 돌아가야만 한다. 그분의 영성 아니면 마귀를 굴복시킬 수 없다는 철칙을 따라야만 한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1:6). 세속 선장이 하나님의 종에게 질타하는 고함 소리를 부끄럽게도 계속 듣고 있어야 할까? ! 주님.

이동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