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몇 점이예요?


주님은 각 사람이 서 있는 영적 여정에 맞춰 시험문제를 내주신다. 그 시험을 풀면 그 다음 시험이, 또 그 다음 시험이 기다리고 있다. 각자의 노력과 의지에 따라 문제를 빨리 풀 수도 있지만, 때론 헷갈리는 아리송한 문제로 많은 고민과 시간이 흘러간다. 이 답도 맞는 것 같고, 저 답도 맞는 것 같은 혼란 속에서 적합한 답을 찾지 못한 채 말이다.

영적으로 어릴 때는 답을 찾는 것에 전전긍긍하며, 해답을 적는 것조차 어렵다. 차츰 성장하면 할수록 답은 알 수 있지만, 그 답을 적기까지의 결단과 용기가 필요할 때가 많다. 때론 다른 사람의 답안은 꿰뚫고 있으면서 자신의 시험지를 바라보는 순간 아는 답도 잊어버리곤 한다. 그 답을 쓰지 못한 채 세월을 흘려버리기도 한다.

나 또한 이러한 혼란 속에서 많은 생각과 방법들이 교차한다. 시험 답안지에 순간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표현을 어떻게 기록 할 것인가를 선택하다보면 가끔은 피곤할 지경이다. 그럴 때면 부자 청년이 자주 떠오른다. 어떤 선행을 하여야 영생을 얻느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고, 계명을 다 지킨 후 무엇이 부족하냐는 물음에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청년의 가장 큰 소유인 물질을 포기한 후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소유를 포기해야 가능 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더 어려운 것은 한 번 포기하고 따라가면 끝이 아니라, 순간순간 따라가야 하고 매번 포기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단 한번으로 끝난다면 기꺼이 하겠는데, 가다보면 또 포기 할 것들이 생겨난다.

매 순간순간이 부자청년처럼 근심하며 갈등하다 돌아가기도 하고 때론 주님의 말씀을 좇기도 하는 삶의 연속이 신앙의 길이다. 어느 때는 하나님이 뜻하시는 답을 쓰기까지 버겁고 비참하리만큼 쓰라리기도 하다. 하지만 나를 포기하고 내 뜻을 꺾고 주님의 뜻을 따를 때 그 보상과 기쁨과 감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억지로 오리를 가자하는 이웃이 있다면 십리까지 함께 가주고, 겉옷을 벗어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벗어주고,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때리라고 돌려주는 것이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길이다. 답을 쓰기 위해 피나는 고민과 갈등, 번민은 수도 없이 반복되지만, 모범답안을 쓰는 순간 주님은 시험결과에 가장 합당한 선물을 주시고 칭찬해주신다. “참 잘했다. 답을 쓰기까지 네가 얼마나 애쓰며 싸웠는지 이 답을 보니 알겠구나! 수고했다.”고 주님은 격려하시며 위로해주신다.

요즈음에 나를 돌아보면 이리저리 연필을 굴리듯 포기와 순종을 왔다 갔다 하다가 타협 쪽으로 선택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조심성으로 인해 끙끙거리기보다 차라리 타협이 더 똑똑해 보이고 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처한 환경도 변하고, 좋아하는 일도, 사람들도 다 변하고 지나간다. 그리고 그것들은 정답을 쓰게 해주는 도구들이다. 도구를 위해 정답을 포기하는 어리석음은 범치 않아야겠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 한분을 위해 그분이 원하시고 만족하실 수 있는 정답을 꾹꾹 눌러 써야만 한다. 착한 아이처럼 말이다. 예수님은 순수한 아이들을 사랑하셨으며 아이들과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적당히 타협하고 가리기보다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박하고 깨끗한 심령으로 주님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즉시 모범 답 쓰기를 기도해 본다. 자존심과 내 유익을 접고, 내 주관과 이성적인 판단을 내려놓고, 맑고 착하게 주님의 뜻을 따르며 이제라도 망설이지 않고 하나님께서 내주신 인생의 수많은 시험들을 풀어나가야겠다. 비록 평탄치 않고 슬프고 어려운 시험들이 내 앞에 끝없이 펼쳐질지라도 다시 전진하면서 하늘나라 의 성적표를 바라보면서 가야겠다. 하늘나라에 기록된 내 점수는 과연 몇 점일까?

허윤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