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타


지난 사순절에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를 보게 되었다. 상영 도중 여기저기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수님의 고통이 너무나 참혹하고 처참했다. 예수님의 어머니께서 통곡하시며 우는 모습에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얼굴을 감싸고 울었다.

열 번도 넘게 영화를 봤는데, 이번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이 그렇게 슬퍼 보일 수가 없었다. 가시면류관을 쓰신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온 몸에 상처가 있고, 채찍에 맞은 자국이 찢어져 등뼈가 하얗게 보이는 주님의 모습을 보고 울다가 몸을 휘청거리며 땅바닥에 주저앉아 실신하는 어머니.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서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시면서 모래를 움켜쥐며 또 주저앉아 울던 어머니. 발등으로 흐르는 피에 입을 맞출 때 다 이루었다하시며 숨을 거두시는 주님을 부둥켜안고 울다 또 땅바닥에 쓰러지는 어머니. 얼마 후 한 병사가 창으로 주님의 옆구리를 찌르는 모습을 보며 같이 창으로 찔리는 고통을 느끼며 또 쓰러지는 어머니. 예수님의 시신이 십자가 위에서 내려질 때 주님의 몸을 끌어안고 울다가 옆구리에 커다란 상처를 보고, 또 가슴에 칼날로 심장을 관통하는 것처럼 큰 고통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어머니. 예수님의 반쯤 열려있는 눈을 감겨 드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수많은 상처들을 하나하나 닦아주시는 어머니. 머리에 박혀 있는 가시들을 하나하나 빼내주며 피로 범벅이 되어 흐트러져 있는 머리를 가지런히 벗겨서 부드러운 손길로 귀 뒤로 넘겨주는 어머니. 주님의 성스러운 두 뺨에 입을 맞춘 후 끌어안고 비통한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이 슬픔을 어느 누가 알랴. 그 고통은 말로는 묘사할 수도 측량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모든 어머니들이 예수님의 어머니처럼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 고통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다고 가정하면 아마도 어느 정도는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계신 어머니 마리아의 고통과 괴로움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30년 전, 폐결핵에 걸려 삼각지 화실에서 떠나오던 마지막 밤에 그린 그림이 피에타였다. 고향에 내려와 요양을 하다가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좀 회복되는 것 같더니 더 악화되어 3년이 넘도록 고생을 하였다. 죽기만을 바라고 완전히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어머니께서 송장 같은 아들 얼굴을 끌어안고 밤새우셨다. 피를 토하며 기침을 할 때 요강을 갖다 대시고 등을 두드리다가 숨을 못 쉬면 손가락을 입에 넣고, 가래를 빼내시고 나중에는 당신 입으로 혈담을 빨아내셨다. 어머니의 그 슬픔과 고통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누가 이 슬픔에 겨워 죽어가는 아들을 끌어안고 우는 어머니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처절하게 우시는 어머니를 보시고 그 자식을 살려주셨다.

피에타는 슬픈 사랑이다. 쓰라린 고통이 없는 사랑은 생각할 수가 없다. 사랑은 고통의 눈물에 의해 만들어져 간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삼상1:15-16). 몸부림치며 슬피 우는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위로하시며 아들 사무엘을 주신 하나님. 하나뿐인 아들을 잃고, 울 힘도 없어 슬퍼하는 수넴 여인을 보시고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 살려 주시는 하나님.

이단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일삼던 아들 어거스틴을 위해 기도하던 어머니 모니카가 있었다. “염려 마시고 기도하시면 하나님께서 꼭 응답해 주실 겁니다. 눈물의 자식은 망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해주던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답변을 듣고 눈물로 기도하던 모니카는 결국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었고, 어거스틴은 방탕한 생활을 접고 돌아와 히포의 감독이 되었다. 많은 책과 설교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신 교부요 위대한 성자가 되었다. 어머니 모니카가 마지막 하신 말씀은 아들아, 강단에서 이 어미 치마에 묻은 눈물을 기억해 다오.”였다.

십자가를 지고 마지막 골고다 언덕에서 울면서 따라오시는 여인들을 향하여 예루살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내 자녀를 위해 울라”(23:28)고 하셨던 우리 주님. 예루살렘 딸들은 주님께서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곁에서 함께 아파하고 우셨던 여인들이다. 그분들은 세상에서는 아무런 힘도 없는 보잘 것 없는 여인들이다. 로마 군병 하나 어떻게 해볼 힘이 없는, 명예도 물질도 없는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여인네들이다. 그러나 주님께는 가장 잊지 못한 분들이셨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특별히 예루살렘 딸들에게 가장 귀중한 사명을 맡겨 주셨다.

가장 어려울 때 가장 필요한 건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 아니라 어머니의 마음이다. 죽어가는 아들을 끌어안고 밤새우시는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어려운 시대마다 위대한 성화된 성도들을 세우셨는데, 그 뒤에 보이지 않는 어머니들의 눈물의 기도가 있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이용도 목사님의 어머니. 이세종 선생님의 어머니. 주기철 목사님의 어머니가 계셨다.

타락한 영국을 일깨운 요한 웨슬리에게는 어머니 수산나가 있었다. 딸은 그 어머니를 슬픔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가장 사랑했던 큰 아들과 장성한 자녀 3명을 연달아 보내야만 했던 슬픔이 계속되고, 딸들의 비극을 보면서 메어지는 가슴을 숨죽이며 삭혀야했던 어머니. 남편 사후에 많은 빚을 떠안은 채 가난을 평생 십자가로 안고 살아야했던 어머니. 바람 잘난 없는 일평생 슬픔의 눈물을 흘리며 사신 어머니에게 요한 웨슬레와 챨스 웨슬리라는 믿음의 사람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수산나는 무엇보다 믿음으로 기도하던 어머니였다.

시대의 혼란에 개의치 않고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슬피 울며 기도하신 어머니들. 삶에 불어 닥친 수많은 환난과 고통을 눈물의 기도로 이겨내신 어머니들. 오늘 이 위기의 상황 속에서 주님이 예루살렘 딸들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나라와 민족 특별히 분단 70년을 맞는 올해 복음으로 통일이 되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게 해달라고, 이 복음이 저 북녘동포들과 예루살렘 땅 끝까지 전파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어머니들을 부르고 계신다.

죄악이 관영한 마지막 때를 살고 있다. 곧 다가올 환난을 지혜롭게 준비해야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들의 통곡에 기도가 필요하다. 이 기도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

창자가 끊어지는 기도. 땀과 눈물과 피가 흥건하게 젖은 겟세마네기도처럼 오늘 이시대도 주님과 함께,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며 민족의 죄를 회개하고 온 인류의 죄를 회개하며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주님은 가장 힘들고 어려운 때 예루살렘 딸들을 찾고 계신다. 진정 주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며 그 곁에서 슬피 우는 여인들이여 나아오라. 인류의 죄를 위해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속죄제물이 되신 주님을 쓸어안고 슬피 우시는 어머니 피에타가 필요하다.

새벽 미명, 아직 어둠이 채가시지 않은 무덤 앞에서 슬피 울며 주님을 부르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우리 주님. 슬피 우는 모든 여인들이여,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11:25)라며 우리 주님께서 모든 슬픔과 눈물을 친히 닦아 주실 날이 곧 이를 것이다.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