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생각나는 단어들이 있다. 고난, 희생, 경건, 금식, 금욕 등이다. 이 모든 단어들을 종합하여 한 마디의 단어로 표현한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절제가 아닐까 싶다. 절제란 헬라어로 엥크라테이아라고 하는데, 한글성경에는 절제라고 번역했지만, 영어로는 ‘self control’인데, ‘자기 스스로를 알맞게 잘 조절한다.’는 뜻으로서 조절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522-23절에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나온다. 왜 절제가 맨 마지막 열매일까? 제일 작은 열매이고, 비중이 크지 않기 때문일까? 절제가 마지막에 언급된 것은 절제야말로 다른 열매들을 완성시키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절제는 열매들의 매듭이다. 반면에 베드로후서 16절에는 믿음에서 출발하여 사랑으로 완성되는 과정에서 중간 길목에 절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이 완성되려면 그 중간에 절제가 많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며라고 했다.

돼지들이 모여 인간들을 하나님께 고발했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인간들이 먹는 것을 절제하지 못하고 과식할 때 돼지처럼 먹는다.’고 하는데, 실상 돼지들은 위에 70~80퍼센트가 차면 아무리 맛난 것이 있어도 더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억울하여 돼지처럼 먹는다.’는 말을 미련한 인간처럼 먹는다.’로 고쳐달라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돼지들의 손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돼지도 스스로의 조절 능력이 있는데, 사람들은 스스로의 조절 능력인 절제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돼지들이 과식해서 배탈이 났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술에 취하여 비틀거리는 짐승을 본 적도 없고, 과로로 쓰러지는 개미를 본 적도 없다. 유독 인간들만 먹는 것이든, 일하는 것이든, 말하는 것이든 절제하지 못한다. 그래서 절제는 질주하는 자동차의 브레이크와도 같다. 인생의 과욕을 조절하여 인생이 안전하게 달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성품이 절제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는 자유를 주셨고, 선악과만은 먹지 못하게 하셨다.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은 것은 불순종이었지만. 그것을 바라볼 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을 절제하지 못한 것이 또한 죄의 의미인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이 실패한 것을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이 회복하셨다. 40일을 금식하시고 주리셨을 때 마귀의 유혹을 절제함으로써 잘 이기셨다.

절제는 우리 삶 구석구석에 필요하다. 가장 많이 필요한 곳은 본능이다. 식욕, 성욕, 명예욕 같은 본능을 절제하여야 한다. 노아의 홍수 심판은 곧 절제하지 못한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인 것이다. 타락한 아담 후손들이 욕망대로 사는 모습이 죄의 관영함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고백했다. 절제가 필요한 곳은 우리의 마음이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25:28)고 말씀하셨다. 또한 절제가 필요한 것은 사물에 대한 영역인데, 특히 미디어와 오락, 음악 같은 것이다. 타락한 루시퍼는 찬양 담당 천사였음을 기억하자. 찬양의 대가였던 그가 오늘날 얼마나 많은 미디어와 오락, 잘못된 음악으로 이 시대를 미혹하고 있는가.

절제는 우리 신앙생활에 매우 유익하다. 이사야 586절 이하에 보면,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이란 말씀이 나온다. 금식은 절제 중 대표적인 것이다. 꼭 금식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절제를 하게 되면 그를 통한 유익을 얻게 된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58:6).

우리에게 흉악의 결박, 멍에의 줄, 압제가 있다면 절제하는 삶으로 주님께 나가자. 또한 8,9절에는 어떻게 약속하고 계신가?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빛이 아침에 떠오르는 해처럼 비취리라고 말씀하신다. 치료가 급속히 일어난다 말씀하신다. 여호와의 영광이 호위한다고 말씀하신다. 부를 때에는 응답하시겠고, 부르짖으면 여기 있다고 대답하시겠다고 하신다. 그야말로 절제가 주는 위대한 유익이다.

이어서 11,12절의 말씀에는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고 하신다.

주님이 절제하는 자를 항상 인도하여 주신다고 하신다. 마른 곳에서도 영혼을 만족케 하신다고 하신다. 지금의 환경이 메마르고 힘들다, 원망 불평할 것이 아니라 절제의 유익을 구하자. 뼈를 견고케 하신다고 하신다. 우리의 영혼이 물댄 동산과 같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과 같게 하시겠다고 하신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절제생활을 사순절과 같은 절기에만 할 것이 아니라 늘 힘써야 할 것이다. 황폐한 영적 환경, 파괴되고 무너진 이 시대에 우리에게는 보수하는 자가 필요하고 길을 수축하는 자가 절실히 필요하지 않은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절제를 드리자. 절제의 열매를 맺자.

이안드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