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인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


중국 안후이 성에 살던 장모 씨는 차를 타고 고향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길가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지만 모른 척 무시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기 차에는 블랙박스가 없어서 혹시 도와줬다가 뺑소니범으로 몰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가 자신을 마중 나갔다는 소릴 듣게 되고 뒤늦게 불길한 마음에 사건현장으로 가보니 쓰러져 죽어가던 사람이 자신의 어머니였다 한다. 경찰 수사 후 뺑소니 범인은 잡았지만, 어머니를 두고 지나간 비정한 아들이라는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오불관언(吾不關焉)이 불러온 참사였다.

오불관언(吾不關焉)이란 남의 일에 상관하지 않는다.’는 사자성어다. 요즘 중국에서 유행하는 말이다. 중국인들은 남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타인을 도왔다가 오히려 피해를 보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중국 광동성에서는 길가에 쓰러진 노인을 도왔던 남성이 폭행범으로 지목되어 결국 자살하는 일까지 생겼고, 장수성의 펑위라는 사람은 버스를 타려다 넘어진 노인을 도와주었다가 가해자로 지목되어 많은 벌금을 배상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오불관언의 사상이 중국 내에서 관행이 되어버렸다.

최근에는 물에 빠진 자신의 아이들을 구하고 죽은 젊은이에게 아이의 엄마가 배상을 해야 할까봐 익사의 책임을 전가하고 모른 척한 기가 막힌 일도 있었다. 자칫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구한 의사자의 선행이 하마터면 부주의한 실족사로 둔갑해 진실이 묻힐 뻔한 사건이다.

이 엄마는 자신의 아이들이 부주의로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길을 가던 멍루이펑이라는 청년에게 구해달라고 매달렸다. 그런데 물에 빠진 아이 둘을 구하고 멍루이펑은 미처 자신은 물에서 나오지 못하고 죽은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아이들을 구하다가 익사한 이 청년에 대해 배상해야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자신에게 손해가 올까봐 서둘러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얼마 후, 그 청년의 영결식에 뒤늦게 찾아가 아이들과 무릎을 꿇고 통곡하며 뒤늦은 사죄와 함께 1만 위안(170만원)의 조의금을 내놓았지만, 부모는 단지 사과의 말 한 마디가 필요했다면서 조의금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람들이 오히려 누명을 쓰게 되거나 피해를 입다보니, 중국에서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남을 돕지 않으려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이렇듯 오불관언의 사례가 많아지면서 중국에서는 선한사마리아인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급격한 산업화와 물질주의 팽배로 도덕성이 상실되고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데,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다 문제가 발생한 경우 구호자를 처벌하지 않는 이른바 선한 사마리아인 법을 제정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한다.

원래 착한 사마리아인 법의 중심적 내용은 타인이 위험에 처한 것을 알거나 보았을 때, 자신이 크게 위험하지 않을 경우라면 타인의 위험을 제거해주어야 할 구조 의무다. 그러나 선의로 타인을 도와주다가 엉뚱하게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아지자, 각 나라마다 법의 적용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이 안타까운 현실이 비단 중국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디모데후서 3장에 보면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며 말세의 징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사람들은 자기와 자기 가족 외에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긴다. 가족은 혈육간의 끈끈한 애정으로 결속된 관계이기에 자기 일처럼 돌아보고, 가족의 행복을 위해 갖은 방법으로 돈을 모으려고 한다. 그것이 현대 사회의 가장 주된 목적이 되어버렸다. 그러다보니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손해를 입을라치면 자라처럼 목을 숨기고, 또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 타인을 밟고라도 올라서려는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 태도가 얼마나 만연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는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고 권면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 모두 한 형제요, 자매이며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하다보니 종종 도움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사연을 들어보면 하나같이 다 안타까운 사연들과 어느 한 곳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분들을 모두 강도 만난 이웃으로 봐야 할지 선별해서 도와야 할지 애매할 때가 많다. 무턱대고 말을 다 믿을 수도 없고, 믿기지 않아도 속아줘야 하는 경우도 있다. 영적 분별력이 부족하고 마음이 약한 나로서는 늘 고민스럽다. 오죽하면 개척교회를 찾아와 도움을 청할까 싶어서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주기도 하고, 더 주면서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당부를 잊지 않는다. 그러나 솔직히 내 마음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애프터서비스까지 책임질 마음은 준비되어 있지 않다. 혹시라도 상습적으로 도움을 청할까봐 내심 염려가 된다. 손해보기 싫어하고, 혹시라도 내게 피해가 올까봐 마음 졸이는 왕 자아가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강도 만난 낯선 이웃을 구해 치료해주고 또 그 이상의 치료를 위해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았던 선한 사마리아인의 조건 없는 긍휼과 사랑은 우리를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예표한다고 볼 수 있다. 살면서 강도떼와 같이 갑작스러운 환난을 만난 우리에게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우리를 치료해주시고 새 생명을 주시고, 또 광야 여정 가운데서도 순간순간 돌보아주셨다. 그런 큰 은혜와 사랑을 받은 우리가 이제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인정이 메마르고 각박한 이 사회에 그 사랑을 돌려주었으면 한다.

주선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