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사랑, 독립운동

언젠가 학교에서 소풍으로 멀지 않은 대성산 송태에 있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별장이 있는 곳에 가게 되었다. 산에 올라가는 길에 작은 돌들이 다 서 있었다. 누군가가 돌을 모두 세워 놓은 것 같았다. 이상해서 선생님께 물어보았다. 선생님의 대답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건 안창호 선생님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산책 나올 때마다 돌들을 세워 놓으신 거란다. 조선의 자주 독립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돌을 세워 놓으신 거지.”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나는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조선의 독립을 별로 생각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안 계셨기 때문이었을까? 하기야 그때 교회에서는 신사참배를 거절하던 주기철 목사님을 장로교회총회에서 출교했던 때라 누구도 무서워서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때때로 정의학교에서는 선교사이자 교장인 헐버트 선생님이 앞장서서 가시면 우리는 모두 신사참배를 꼬박꼬박 가곤 했다. 학생들은 학교 내에서 일본 말만 해야 했고, 일본 선생님들에게서 배우고 있었다. 일본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시거나 복도에서 만나면 일본말을 했지만 보통 때는 한국말을 사용했다.

나는 조선 사람이다. 그리고 일본 식민지 백성이다. 그래! 나도 내 나라 독립을 위해 일해야 할 사람이었다. 도산 선생은 얼마나 조선독립의 열망이 끓으셨기에 이처럼 작은 돌, 큰 돌을 하나하나 산책길에 세워 놓았을까? 나를 확실한 조선인으로 돌아오게 하는 가슴 뭉클한 경험이었다. 이때부터 나의 민족애는 싹트기 시작했다.

남존여비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1910~1920년대에 한국의 기독교 여성들의 목숨을 건 애국운동과 독립운동은 찬란한 역할을 했다. 일본인들은 이런 사회의식이 강한 여성을 육성하면 계속 독립운동으로 식민지 조선을 잃어버릴까봐, 여성 교육의 목표를 현모양처(賢母良妻)로 정하고, 사회 활동하는 여성은 오덴바(말괄량이의 일본말)’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우리는 말괄량이가 안 되려고 했다. 나는 조용하고 정숙한 여성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까닭으로 선배인 김활란 선생이나 고황경 선생 등이 가졌던 애국심은 우리 시대부터 잊히게 되었다. 우리 정의학교 동창 중에 사회 활동을 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도 이런 교육 때문일 것이다. 대선배이신 고() 이태영 박사를 빼면 사회에 알려진 인물이 별로 없다.

일본어와 일본 역사는 배웠지만 한글과 한국 역사는 배우지 못했다. 일본이 미국을 침략하기 시작하자 전시 체제로 들어가면서 일본의 포학한 정치는 더욱 심해졌다. 전쟁에 나가는 군인 전송하기, 그들을 위한 위문대 만들기, 자기의 성()도 일본어로 개명하고, 쇠붙이는 모두 공출하는 등 심각한 식민지 공세를 펴고 있었다.

체육 시간에는 목검을 배웠다. 오후가 되면 많은 시간을 근로봉사로 할애하여 대동강 모래사장에 나가 뜨거운 땡볕에서 리어카에 모래를 실어 나르는 작업을 했고, 가을에는 벼 베기 등 농사일을 해서 일본이 하는 전쟁에 보탬을 주어야 했다.

유치원 보모가 되다

여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유치원 보모가 되었다. 우리 가정을 자기 친형제처럼 돌봐 주시는 아버지 사촌이신 백부님은 동평양교회 회계를 맡으셨던 주요남 장로님이시다. 대동교를 건너자 선교리 추입에 꽤 큰 규모의 동평양 정미소를 경영하시면서 얼마 안 되는 우리 할아버지 유산도 관리해주셨다. 그뿐 아니라 무상으로 집을 빌려주시고 늘 돌보아 주셨다. 그분이 유치원을 경영하셨는데, 백부님의 배려로 나는 동평양 유치원의 보모가 되었다.

나는 부끄러운 마음에 어린 아이들에게 동화 하나도 못 읽어주고, 피아노 반주와 놀아주는 것 밖에 못하는 초짜였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을 즐거워했다. 보모로 같이 일하신 분들과 함께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때에 평생 유치원 일을 하다가 나이가 들어 유치원 원장하면서 동심 천국으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기도 했다.

생각지 않은 결혼 문제가 나왔다. 어머니는 당신이 언제 40세가 될까 기다리면서 힘겨운 젊은 과부 생활을 하셨다. 신학을 하면서 나의 주일학교 선생이었던 최기호 전도사는 그 당시 평양신학교 학생이었다. 어머니는 그를 훌륭하게 보고 있었다. 그를 나의 신랑으로 점찍어 두었다고 하셨다. 그 역시 나를 좋아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와 결혼한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아니라고 강하게 표현해보았지만 어머니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나는 전통 사회에서처럼 부모의 의지를 따르기로 했다. 어머니는 외로워서 사위라도 빨리 맞으려고 서둘러 정하신 것이다. 결혼식 날에도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멀지 않은 동광교회가 그의 목회지였다. 그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게 되었다. 나는 유치원 보모를 계속하며 조금씩 살림살이를 장만하였다.

어느 날 밤이었다. 앞집 목공소에서 불이 났다. 한밤중에 불이야!”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몸만 피하기로 하고, 부엌 뒷문으로 우리 세 식구는 허겁지겁 놀란 가슴을 안고 뛰쳐나갔다. 불길이 하늘을 치솟는데 얼마나 떨리던지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처음 당한 놀라움과 두려움, 절망이었다. 그 불을 보면서 지옥 불을 연상했다. ‘마지막 심판이 이토록 무서운 것이겠구나.’ 나는 이 경험을 통해 인생의 허무함을 배웠다. 종말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존재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배우게 된 것이다. (계속)

주선애(장신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