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아니면

b9b0b4ed1.jpg헌팅턴 희귀병을 앓고 있는 남편과 아이를 돌보는 나에게 사람들은 이런 말을 곧잘 하신다. “중환자를 두 명이나 돌보고 계시니 하늘에서 받을 상급이 아주 많겠어요. 정말로 대단하세요. 저보고 그렇게 살라고 하면 벌써 도망갔을 거예요. 아주 빠르게 성화에 이르실 거예요.” 처음에는 인사나 격려의 말쯤으로 생각하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과연 내가 이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이거 큰일 났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이다음에 하나님 앞에 설 때 너는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다 받았으니 나는 아무것도 네게 칭찬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면 어찌하나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 듯하였다.

누구보다도 주님이 나를 잘 아시고, 나 스스로도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부족하고 부끄러운 사람인 것을 잘 알고 있다. 경건의 능력은 없으면서 경건의 모양만 나타낸 것이 아닌지 두렵기까지 했다.

남편은 식사를 할 때 본인 입맛에 맞지 않은 음식이다 싶으면 입을 꾹 다물고 벌리지 않아서 식사시간이 한 시간 이상 걸릴 때가 많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기 때문에 음식물이 얼굴과 옷에 묻는 것도 다반사다. 심지어는 갑자기 푸하고 품기까지 하니 정말이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때면 요양원에 보내지 않고 내 삶을 희생하면서 돌봐주고 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하면서 아이처럼 변한 남편에게 소리치곤 했다.

자상하고 친절했던 남편이 뇌세포가 소멸되면서 아이처럼 변해가는 모습에 속상했다. 또한 평범하지 못한 삶을 사는 것과 온유하지도 못하고, 겸손하지도 못하고, 인내하지도 못하고, 사랑하지도 못하는 너무나 부족한 내 모습 때문에 참 많이도 울었다.

주님, 저는 더 이상은 못 돌보겠어요.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잖아요. 감당할 수가 없어요. 저는 사랑으로 돌볼 능력도 없어요.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털썩 주저앉아 울면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주님께서 두 팔로 어깨를 포근히 감싸주시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미선아, 내가 다 알고 있단다. 조금만 참으렴. 네 남편과 아들은 내가 사랑하는 아들들이란다. 내가 주는 은혜로 감당하여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너무나도 절박한 상황을 아신 주님은 성령의 불 체험을 주시면서 뜨겁게 만나주셨다. 그럼에도 남편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나에게 주님은 어느 날 아주 엄하게 말씀하셨다. 하루는 성전에서 홀로 밤 기도를 하는데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셨다. “제가 누구를요?” “네가 핍박하는 남편이 바로 나란다.”

주님은 때로는 엄하게 책망하시면서 때로는 부드럽게 권면하시면서 나의 발걸음마다 은혜로 인도하고 계셨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도 이제까지 남편과 아이를 돌볼 수 있었던 것은 나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다. 사도 바울처럼 나에게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내 연약함 안에 머무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시다. 주님은 너무나도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그때마다 필요한 은혜를 공급해주시는, 무척이나 좋으신 분이시다.

혹 주님은 사랑하는 두 아들을 맡기시고 나처럼 부족한 사람을 쓰시느라 답답하시고 힘들지 않으실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가장 가까운 또 다른 이웃인 남편과 아들을 맡겨주신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쓰라린 아픔과 고통을 통해 주님은 내게 말씀하고 계시다. 나의 잘난 것이 자랑이 아님을. 나의 못남이 자랑임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족들의 수족이 되면서 보게 하신다. 그들의 손발이 되도록 나를 온전한 몸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임을. 그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고 있음을 또다시 보게 하신다. 저 영원한 천국에서 새롭게 재창조된, 부활의 몸을 다시 덧입는 소망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이 땅에서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이시요 사람이신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겪으신 십자가의 모진 고통과 그 큰 사랑의 빚을 어찌 다 갚을 수 있을까. 나의 수고와 땀과 눈물이 아무리 많은들 저 넓은 바다에 비하면 한 방울에 불과하겠지만 앞으로 나아간다. 순간순간 내 몫에 태인 십자가로 인해 눈물지을 때도 많지만, 주님의 은혜로 나 여기 서 있음을 고백하며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한걸음씩 전진하기를 소망해본다. 어느 새 은혜 아니면이라는 찬양이 내 입에서 흘러나온다.

어둠속 헤매이던 내 영혼 갈 길 몰라 방황할 때에 / 주의 십자가 영광의 그 빛이 나를 향해 비추어주셨네 / 주홍빛보다 더 붉은 내 죄 그리스도의 피로 씻기어 / 완전한 사랑 주님의 은혜로 새 생명 주께 얻었네 / 나의 노력과 의지가 아닌 오직 주님의 그 뜻 안에서 / 의로운 자라 내게 말씀 하셨네 완전하신 그 은혜로 / 은혜 아니면 나 서지 못 하네 / 십자가의 그 사랑 능력 아니면 나 서지 못 하네 / 이제 나 사는 것 아니요 오직 예수 내 안에 살아계시니/ 나의 능력 아닌 주의 능력으로 이제 주와 함께 살리라/ 오직 은혜로 나 살아가리라 /십자가의 그 사랑 주의 능력으로 나는 서리라/ 주의 은혜로 나 살아가리라/ 십자가 사랑 그 능력으로 나 살리라/ 주 은혜로 나 살리라.”

박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