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자

충북 회인군 신곡리는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뒤에는 계절마다 풀어내는 고운 빛깔의 구룡산이 있고, 앞에는 맑은 계곡수가 흐르는 순박하고 깨끗한 동네였다. 그러다 1980년 대청댐이 완공되고 물을 담기 시작하자 군에서 마련해 준 곳으로 주민들은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러면서 이 아름다운 마을은 지저분해지기 시작했다. 쓰레기가 곳곳에 방치되었고, 담장을 새롭게 수리하는 일 등은 벌써 중단되었다. 이 마을에 대한 꿈이 사라지자 나타난 현상들이다. 더 이상 이곳은 비전의 동네도 아니요, 내일을 위해 가슴 설레며 준비하던 일들은 삭제되었다. 그대로 버려진 것이다.

우리의 삶에도 종종 이런 일이 일어난다. 내일에 대한 비전을 품고 실현 가능한 꿈을 꾸는 동안, 우리의 영혼은 생기가 넘친다. 봄에 씨앗을 심는 농부의 마음은 벌써 가을에 추수할 열매를 본다. 그리고 부지런히 거름을 주고, 잡초를 제거하고, 버팀목을 세워 폭풍도 견디고, 물을 퍼 나르며 가뭄도 견뎌낸다. 왜냐하면 그에겐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에 무언가 꿈이 있다면, 우리는 매일 아침 뜨는 눈부신 태양을 경이롭게 맞이한다.

하지만 꿈이 사라지면, 태양은 그저 매일을 지루하게 뜨고 질뿐이다. 어느 날 권태감이 몰려오고 허무한 인생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죽지 못해 산다 생각한다. 자신을 깨끗하게 단장하는 일은 이미 잊은 지 오래가 되고, 옷도 얼굴도 모든 것이 잿빛이 된다. 꿈을 잃은 신곡리 마을처럼 지저분해 지는 것이다.

평생교육원에서 비전과 열정에 대한 강의를 하며 있었던 일이다. 굳은 표정의 여 교역자 한 분이 집중하고 계셨는데, 그 다음 주에 너무나 밝고 활기찬 모습으로 오셨고 쉬는 시간에 잠시 대화를 요청해서 하게 되었다.

목사님, 좋은 소식을 알려드리려고요. 저도 이제 다시 소망이 생겼어요. 오래 전에 잊혀졌던 꿈을 다시 꾸게 됐어요. 소녀 시절에 글을 쓰고 싶었는데, 목회를 하며 다 사라져버렸지요. 근데 지난 주 강의를 들으며 주님을 위해 다시 글을 쓸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한 주간이 생동감이 넘쳐요. 의욕이 생기고 힘이 나요. 감사합니다.”

그분이 과연 그것을 이루게 될까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생기가 넘치는 것이다. 남편과도 함께 책을 읽으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단다. 이 얼마나 유익한 일인가.

꿈을 꾸자. 얼마나 가는지 두고 보자며 누가 비웃음을 준다 해도, 계속 꿈을 꾸자. 그 꿈이 허황된 것이 아니라면, 죄를 낳는 것이 아니라면, 꾸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선물로 받는다. 결과를 염려하는 것은 이미 순수한 꿈이 아니다. 그것은 욕심과 체면이 삽입돼 버린 오염된 욕망이다.

억울한 감옥 속에서의 요셉의 꿈은 형제를 용서하고 친지들을 가뭄으로부터 구원하게 했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의 고독한 생활 속에서도 품고 있던 모세의 꿈은 이스라엘을 애굽 노예생활로부터 이끌어냈다. 무엇보다 온 세상의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꿈은 십자가의 끔찍한 고통을 이기고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케 했다.

끝까지 꿈을 꾸자! 거룩한 사랑이던 사랑 속 삶의 비전이던, 행복은 꿈을 꾸는 자의 것이다.

박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