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좌우는 결코 동서남북이 아니다

bcbab0e6b0fac7f6bdc71.jpg지난 1014일 방지일 목사(103)의 장례예배가 한국교회100주년 기념관에서 있었다. 몇 달 전 그곳에서 내가 먼저 회개한다며 마른 종아리에 회초리를 들었던 모습이 떠오르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서늘한 마음이 들었다.

튼튼한 바탕

박종순(충신교회) 원로목사는 방지일 목사님은, 만날 때마다 한국교회를 마음에 품고 겸손하고 검소한 삶, 옳지 않은 것과 타협하지 않는 삶, 바른 신학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용기를 주셨던 목사님이 그립고 보고 싶다.”고 했다. 늘 교회나 교단의 힘겨루기와 성장에만 초점을 맞춘 맘모니즘을 버리고 생명을 귀하게 여기라고 강조했다.

그의 마지막 설교는 종두득두(種豆得豆)’였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이지만, 종자를 심어도 어디에 심느냐, 옥토에 심느냐, 돌짝 밭에 심느냐, 모래밭에 심느냐에 따라 결실도 달라진다. 아무리 좋은 종자라도 옥토에 떨어져야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거둘 수 있다. 같은 종자라도 바탕이 좋지 못하면 그렇게 수확하지 못한다. 내 마음을 항상 잘 살펴서 돌은 골라 치워야 하고, 수분이 없으면 수분을 공급해야 하고, 굳었으면 부드럽게 다듬고, 언제라도 씨가 떨어지면 가장 잘 자랄 수 있도록 늘 가꾸어야 한다.” 자신의 마음 밭을 수시로 점검하라고 했다.

깊이 공감한다. 바탕과 기초의 중요성을 강조해 무엇 하랴. 안타깝게도 신앙은 좋은 것 같은데 인간성의 바탕이 의문스러운 사람들을 주변에서 종종 보게 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바탕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22:37-40).

인간의 존재의미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니, 무엇보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 그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 두 사랑이 신앙생활의 바탕과 기초다.

이 두 가지 바탕 위에 자기 인생을 만들어가야 한다. 내 은사·직분·재능·재물·실력 등으로 각자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이웃에게는 덕을 끼쳐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변치 않는 것과 변해도 되는 것을 잘 분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변의 진리

세상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변해야 할 것과 변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예컨대 동서남북은 내가 어디에 있든 변하지 않지만, ‘상하좌우는 내가 선 위치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우리가 동서남북과 상하좌우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할 때 비극이 생긴다. 현실과 실제에 적용하는 것은 상하좌우의 분별과 관련된다. 바탕을 다지는 일은 동서남북과 상하좌우를 배우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변치 않는 동서남북은 무엇일까?

성경은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고,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한다고 했다(딤후 3:15-17).

모든 것의 기초와 바탕, 만고불변의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진리는 변하지도 변해서도 안 된다. 주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라고 하셨다. 태초에 계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고 했다(1:1-3). 이 말씀이 곧 변치 않는 동서남북이다.

반면에 상하좌우는 가변적인 요소다. 내 위치와 마음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은 내 위신·체면·자존심·재능·은사·재물·권세·능력 등이라 생각된다. 예수님은 섬기기 위해, 또 자기의 목숨을 인류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은 우리에게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선으로 악을 이겨라 하셨다. 내가 낮아지지 않고 섬기지 않으면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

이탈리아 시에나의 카타리나(1347-1380)는 평소 마을의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어 봉사활동을 잘 하였다. 특히 나병과 흑사병 등 악성전염병 환자들을 위해 정성껏 돌보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번은 나병에 걸린 떼까 부인이 어찌 사납고 포악한지 감당치 못해 그녀에게 부탁이 들어왔다. 어머니는 극구 말렸지만, 그녀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말씀에 순종했다. 처음 만날 때 주님의 평강을 기원하며 인사했지만, 떼까는 나처럼 나병이나 걸리라고 악담했다. 그날부터 밥상이 부실하다고 둘러엎고, 간호하는 손길에 정성이 부족하다고 욕을 해댔다. 잦은 원망불평과 속을 뒤집는 악담과 비방에, 심지어 떼까는 그녀의 손을 할퀴고 말았다.

몇 일 뒤에 손에 붕대를 감고 있는 그녀를 본 떼까는 깜짝 놀라며 붕대를 강제로 풀었다. 나병에 감염된 것이 아닌가. 그제야 떼까는 눈물로 통회하면서 그녀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때부터 떼까는 눈물로 통회하였고 순한 양이 되었다. 얼마 뒤 평안히 숨을 거둔 떼까의 장례를 치룬 뒤 그녀는 시냇물에 손을 씻으니 기적이 일어났다.

이 모든 게 떼까를 구원하기 위한 주님의 섭리였다. 언제 어디서나 주의 말씀은 동서남북과 같이 변치 않는 삶의 좌표였다. 자신의 위신·체면·자존심은 상하좌우이기 때문에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녀는 주님께 대한 사랑과 열정이 뜨거웠기에 동서남북과 상하좌우가 헛갈리지 않았다.

곧잘 동서남북상하좌우를 분별하지 못한다. 내 것에 집착하고 먼저 앞세우니 작은 원수도 사랑하지 못한다. 하나님과 말씀보다 세상적인 것이 더 달콤하여 이성·명예·물질·인기·권세 등에 자주 넘어진다. 우리의 마음이 탐욕과 이기심으로 혼탁해져, 양심은 흐리고 하나님의 선과 빛을 추구하려는 의지는 나약해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께 대한 첫사랑과 열정을 잃어버리고 타성에 젖게 된다.

생전에 늘 검소한 삶, 겸손과 올바른 삶을 역설했던 방지일 목사님. 말씀의 종자를 좋은 마음 바탕에 뿌려야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한다는 권면이 크게 울림으로 다가온다. ‘상하좌우는 결코 동서남북이 아니다. 내 마음이 비뚤어진 게다. 다시는 헛갈리지 않도록 우리의 심장에 동서남북과 같은 하나님의 진리로 각인시키자. 내 위신·체면·자존심·재능·은사·재물·권세가 말씀보다 앞서지 않도록 낮은 마음 달라고 기도하자. 각인된 주의 말씀에 성령이 임하시면 흐린 눈빛이 맑아지고 마음 바탕이 비옥해진다.

이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