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주는 사람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세월호 정국의 해법을 찾지 못해 의회민주주의가 위기를 맞은 상황에서 떼법으로 법치주의까지 흔들리고 있다. 갈등을 조정하지 못하는 정치권과 집단이기주의가 결합된 결과라는 분석이다. 하나님의 중심에서 바라보며 기도할 일이지만 우리의 영적인 문제 역시 이와 같음을 통감하며 반성하게 된다.

떼쟁이 한국

한국연금학회가 지난 922일 국회의원회관에서 개최할 예정이었던 공무원연금 개혁을 위한 정책토론회가 공무원노조의 저지로 무산됐다. 토론회 시작 전부터 공무원 노조원 500여명이 토론회장을 메웠다. 이들은 앞좌석을 모두 차지하고 연금개혁과 새누리당 해체를 외치며, 욕설·막말·함성에 호루라기까지 불면서 통제 불능의 난장판을 이루었다. 결국 주최측은 토론회를 취소하고 말았다.

당장 내가 손해 보기 싫어서 내 이익을 위해 폭력도 불사하겠다는 떼법이 만연된 사회가 잘 될 리가 없다. 정당한 논의 과정을 물리적으로 방해하는 떼법 행위는 문제가 심각하다. 법안을 만들기 위한 논의 자체를 원천 봉쇄하는 것은 집단이기주의가 아닐 수 없다. 정치권이 사회 갈등을 해소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떼법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이런 떼법 현상은 합리적인 절차와 법치를 무시하는 당사자들도 문제지만 근본적으로 정치와 정부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측면이 더 크다.

근간의 예로 안상수 창원시장이 지난 16일 시의회 개회식에서 한 시의원이 던진 계란세례를 받았다. 이어 18일 전국농민총연맹 회원 10여명이 쌀 개방 추진을 규탄하며, 기습적으로 농림축산부 당정협의회에 들이닥쳐 계란과 고춧가루를 던지고 욕설을 퍼부었다. 최근 한국전력이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들을 돈으로 매수하려고 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것도 정부정책에 대한 불신을 부채질하는 실례다. 여야가 사태의 본질은 제쳐두고 막말과 허위사실에 기반을 둔 인신공격으로 매번 양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여기에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사회 분위기도 한몫했다는 평가다. 자신의 이익과 목적 달성을 위해서 합리적 절차를 무시하고 불법을 동원해서라도 집단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억지와 욕설과 폭력이 팽배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당장 자신의 목적은 달성될지 모르지만 이런 것이 축적되면 결국 전체가 망한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다.

지금의 한국 정치와 사회를 보면 과연 누구를 위한 법이며 누구를 위한 목소리인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국민을 위한 정치는 이미 오래전에 정당의 이익을 위해 안중에도 없는 듯 보인다. 이기심만 가득한 현실에 주님의 긍휼을 소원한다.

자신을 주는 사람

톨스토이의 단편 중에 재난의 원인이란 작품이 있다. 담장을 사이에 둔 두 집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느 날 이쪽 집 닭 한 마리가 담을 넘어 저쪽 집에 가 알을 낳고 꼬꼬댁 하며 나왔다. 그것을 본 이쪽 집 아이가 우리 집 닭이 너희 집에서 알을 낳았다.”고 말하자, 저쪽 집 아이는 여기저기 살펴보았지만 알 수 없어 알이 없다고 했다. 아이들의 싸움이 곧 어머니들의 싸움이 되고 아버지들까지 싸우기 시작했다. 서로 거친 몸싸움이 되풀이 되다가 결국은 한쪽에서 홧김에 밤에 몰래 상대편의 집에 불을 질러버렸다.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에 바람이 휙 돌아 불어서 이쪽 집도 다 타버리고 말았다. 양쪽 집 식구들은 잿더미 위에 앉아 허망한 얼굴로 별만 쳐다보고 앉아 있게 되었다.

문제의 원인은 계란 하나가 아니라 결국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자존심과 욕심과 교만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우리가 살아가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심지어 교회나 신앙공동체에서도 자주 작은 감정의 싸움이 불씨가 되어 관계가 악화되거나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낳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우리 존재에 대한 자각이 선행되어야 하겠다. 조금만 서로 양보한다면 많은 문제의 매듭이 풀리고 결과는 더 좋게 될 것이다.

4세기 경 유럽의 어느 나라에 병약한 한 남자가 15살 난 자녀 데오도르를 데리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데오도르는 병약한 아버지를 수발하면서 수도원의 궂은일과 힘든 일을 도맡아 했다. 수년이 지나 아버지는 죽었지만 여전히 수도원에서 살았다. 그는 멀리 떨어진 시장에서 장을 보기위해 가끔 마을의 여관에서 묵어 갈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여관주인의 불량한 딸이 혼전임신을 하여 난리가 났다. 딸은 임기응변으로 가끔 들리는 미남 수사 짓이라고 했다. 화가 난 주인은 수도원에 쳐들어가 온갖 행패를 부렸다. 데오도르는 수도원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죄명으로 죽도록 얻어맞고 쫓겨났다. 비록 쫓겨났지만 그는 수도원 담 밖에 움막을 치고 살다가 원장님의 배려로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동료들의 핍박과 멸시 천대는 형언할 수 없었다. 그는 천하고 힘든 일에 혹사당하여 그만 일찍 죽고 말았다. 장사하기 위해 옷을 벗겨보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자기들이 그토록 간음자라 핍박했던 그가 여자였던 것이다. 수도원의 명예를 위해 혼자 죄를 뒤집어쓰고 그동안 멸시천대를 다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의 이름 앞에 거룩한 성()자를 붙여 성 데오도르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며 데오도르는 혹 다른 동료가 실수한 것이 아닌가 하여 자기가 대신 감당했던 것이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5:13-15).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주는 사람이란 마더 데레사의 말이 그 어느 때보다 더 크게 울림이 되어 다가온다.

내 유익만을 위해 혈안이 된 이기적인 우리 민족, 그리고 나와 우리들. 나를 위해 목숨까지 희생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영원까지 함께 하시는데 어쩌면 이렇게 이기적이고 나 중심적인지 안타깝기 한이 없다. 주님이 속히 임하셔서 구원해 주시고 회복케 하시길 기도할 뿐이다.

내 자존심·탐욕·교만·아집 때문에 덕을 끼치지 못하고 주님의 일이 방해받고 있다면 지금 정리하자. 모든 갈등과 다툼, 불화와 반목은 내 이익, 내 것을 양보하지 않으려는 욕심과 나만 내 가족만 내 단체만 좋으면 괜찮다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에 기인한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자. 주님께서 죄와 온갖 불행 가운데 고통 하는 우리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세상에 오셨고, 대신 십자가 지고 죽으셨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주는 사람이다..

이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