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함께 울자

위로하는 자도 없고,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된 상황에서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회개의 무릎을 꿇었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그 눈물을 닮고 싶다. 나도 눈물로 밤을 지새우리라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의 세력에 져서 스르르 무너져버렸다. 옷을 입은 채로 잠이 들었다. 깊은 밤  뒤뜰에서 귀뚜라미 우는 소리에 놀라 잠이 깬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던 주님의 음성이 귓가에 맴돈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이 '게으른  자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할 뿐이다. 주님 오시는 그날, 가슴을 치면서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통곡치 않기 위하여. 이 밤, 기름을 짜내듯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하셨던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오라고 손짓하시는 듯하다.

잠들어 있는 제자들을 깨우시다 홀로 기도하셨던 주님.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스스로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셨던 주님.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도록 기도하신 주님. 핏줄이 터져 핏방울을 흘리시며 기도하셨던 주님.

육신의 한계를 넘어 밤새워 기도하고 육신을 쳐가며 혼신을 다해 기도할 때다. 잠들어 있는 육체와 정신과 세포를 깨울 때다.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자애로운 예수님의 눈과 마주친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번개처럼 스쳐갔고, 밖으로 뛰어나가 가슴을 치며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닭울음소리가 들리면 언제나 그때를 생각하며 통곡했다고 한다. 우리의 지금 현실을 보면 통곡하고 또 통곡할 때이다.

아직 아물지 않은 세월호 참사로 인하여 울다 지쳐 쓰러져 있는 부모들, 곳곳에 눈물과 한숨과 절망과 죽음의 덫이 온 나라를 어둠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들과 함께 울어주어야 한다.

한 나라가 거대한 아사(餓死)감방이 되어버린 북한. 내 민족, 내 혈육이 기근과 굶주림 속에서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 배를 움켜잡고 울고 있다. 저 북한 땅을 위해 함께 울어주어야 할 때다. 뼈와 가죽만 남아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죽어가는 저 북한 땅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위해 울어야 할 때다. 하루하루 통일이 되기를 학수고대하며 도리어 기복에 젖어 있는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지하교회 성도들과 함께 울며 기도할 때다. 저 죽어가는 영혼들과 함께 울어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세상과 정욕의 포로가 되어버린 이 세대를 향한 다니엘의 눈물 기도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포로로 끌려간 나라와 백성들을 바라보며 바벨론 강가에서 울던 다니엘처럼 울어야 한다. 이 나라와 민족을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살려달라고 통곡하며 울어야 한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이 나라와 이 백성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차라리 저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는 한이 있더라도 저를 죽이시고, 이 민족을 살려주세요. 저 영혼들을 살려주옵소서.”

다니엘처럼, 모세처럼, 울며불며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울어야 한다. 우리의 할 일이 통곡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기독교는 극단의 이기주의 집단으로 사회와 세상으로부터 비난과 욕을 받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통곡할 이유다.

뼈가 으스러지도록 채찍에 맞아 말로 할 수 없는 큰 고통을 겪으셨던 우리 주님. 십자가를 지시고 작은 돌부리 하나에도 넘어지실 정도로 기진맥진하셨던 우리 주님. 그 고통 가운데서도 예루살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3:25) 하셨건만, 내 아픔, 내 가족의 고통이 더 크다고, 나만의 울타리 안에 갇혀 아파하는 이웃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 나, 우리 그리스도인들, 우리 단체.

방탕한 고멜과 같이 음란한 이 세대를 위하여, 죄악의 관영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는 아골 골짜기와 같은 이 민족과 이 나라를 위하여, 통곡의 눈물로 포도원을 만들고, 아골 골짜기를 희망의 문으로 바꾸어줄 자가 누구인가(2:17).

평안하다. 안전하다하며 쾌락과 정욕에 푹 빠져 정신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먹고, 마시며, 장가가고, 시집가며, 세상의 일에 골몰하여 주님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 누가 십자가 앞에 엎드려 진심으로 가슴을 치며 밤새도록 통곡하겠는가?

눈보라 치는 인왕산에 올라 밤새도록 가련한 민족과 나라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신 이용도 목사님은, 성공과 업적과 사역과 일에 치우치다가 가장 중요한 일을 놓쳐버리고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 거룩하게 당부한다.

예수님을 알라. 저 예수님의 사랑의 운동을 알아라. 공연히 무슨 사업을 하려고 분주하지 말고, 먼저 그의 사랑을 알라. 말도 없고 일도 없는 그 사랑의 활동을 알아라. 그러면 거기에는 눈물이 있으리라. , 그 사랑에 감격하여 그의 발아래 엎드려 눈물로 씻으며, 그의 사랑에 접촉하여 자기의 죄악을 고하고, 그 사랑의 음성을 들으라. 이 일이 그의 사랑을 모르고서 떠들고 활동하는 것보다 주님께서 훨씬 더 기뻐하시는 것이다. 남이 모르게 그윽한 밤중에, 새벽에, 산에서, 거리에서 흘려 뿌리는 그 눈물 사랑을 좀 이해하라. 그 사랑을 모르고 영생할 자 어디 있느냐? 예수님을 아는 가운데 자라가라.”

엄동설한 깊은 밤중에 칼바람이 부는 차가운 돌박산 바위 위에 앉아 새벽을 맞도록 기도하셨던 주기철 목사님. 모진 매와 숱한 고문 가운데서도 쓰러져가는 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남기셨던 마지막 유언이 우리의 안일함을 깨우고 있다.

우리 주님이 가신 그 길은 눈물 없이 못 가는 길이다. 피 없이 못 가는 길이다. !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동방의 예루살렘아, 영광이 너에게서 떠나는도다. 우뚝 솟은 모란봉아 통곡하여라, 대동강아 대동강아 나와 같이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미천한 목숨이나마 주님 위하여 제물로 드리리다.”

강직성 척추염으로 40년 병상생활을 하시며 인고의 세월을 사셨던 선생님은 엄청난 고통이 계속될 때면 깊은 영혼의 노래를 부르셨다. “너의 찾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종일 핍박하오니 나는 주야에 눈물 흘려 음식을 삼았나이다. 행여 슬픈 마음을 품지 말아라. 낮에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고 밤에 노래 불러서 주를 기리니.”

무지한 제자들과 공동체를 위해 가슴을 치며 새벽 두 시 반까지 기도하셨던 선생님. 그때는 그 애절한 기도소리가 귀로만 들렸는데 이제는 마음속 깊은 데서 들려온다.

나와 함께 울자.”고 주님께서 이 밤 애타게 부르신다. 모든 걸 포기하고 주님 따라 살아온 길, 이제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돌에 맞아 죽어도 이 길을 가리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목이 멘 성 프랜시스처럼 눈이 멀어도 눈물을 흘리며 이 길을 가리라. 주님이 가신 골고다의 길, 위로하는 자 없고 원수들이 나를 다 에워싸고 버림받고 죽더라도 이 길을 가리라.

주여, 이 가련한 영혼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지체지 마옵소서. 이 나라와 민족을 부흥시켜 주옵소서. 이 생명 다하는 그날까지 통곡하다 주님 나라 가게 하옵소서. 만물의 찌끼만도 못한 이 죄인, 주님 발 앞에 엎드려 다시 간곡히 아룁니다.”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