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 십자가

주일학교 아이들과 종이접기를 한 후, 색상지에 종이십자가를 붙이고 꾸미기를 하였다. 한 아이가 십자가가 허수아비 같아요.”라고 하는데, 순간 마음이 뜨끔했다. 놀란 마음을 숨기고자 대뜸 하지만 우리는 종이십자가도 제대로 잘 짊어지지 못한단다.”라고 하자 왜요?”라고 묻는다. “그건 말이지, 자그마한 일에도 쉽게 짜증내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거친 말을 하는데, 그런 모습들이 바로 종이십자가도 짊어지지 못하는 모습들이란다.” 맨 뒤에 앉아 있던 남자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빤히 쳐다보는데, 불현듯 주님께서 나를 꾸짖고 계시는 듯했다.

네가 지고 있는 십자가는 어떠냐. 지푸라기로 만든 허수아비 십자가가 아니냐. 마귀인 새가 날아와 영혼의 양식을 쪼아 먹어도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십자가만을 세워 놓은 것은 아니냐. 그럼에도 뭘 그리 우쭐대고 있느냐. 너는 지금까지 심판대 앞에서 시험의 불에 다 타버릴 지푸라기와 같은 헛된 공력만 쌓고 있지 않았느냐.’

주님이 맡겨주신 사역을 하면서 내 안의 욕망과 두려움의 덫에 걸려 십자가를 내려놓고 싶은 적이 적잖이 있었다. 고통스럽게 여겨지는 십자가나 순간순간 주어지는 작은 십자가들을 끝까지 안고가야 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마음 편하게 부대낌 없이 살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십자가를 잘 지고 가는 양 사람들 앞에서는 포장을 하였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듯(고전1:22) 눈에 보이는 능력과 성공과 은혜만을 좇다가 정작 십자가는 뽑아버려야 할 가시처럼 여긴 때가 많았다. 이성적인 판단과 지식을 앞세우면서, 우직하게 십자가만 따르는 것은 왠지 바보처럼 느껴졌다. 위로와 칭찬은 좋으나, 약함과 수치와 패배와 궁핍은 마치 하나님의 저주인(21:23) 듯 빨리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동안 허수아비 십자가만을 세워 놓은 채, 허례와 위선으로 점철된 거짓된 삶을 살고 있었다. 생명력 없는, 지푸라기 십자가만을 붙들고 살아가니 무엇 하나 만족함이 없었다.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도 그러했다. 십자가의 복음을 알기 전까지는 늘 목이 말랐다. 여인들을 좇아다니면서 정욕을 불살라도 만족이 없었다. 철학을 공부해도, 수사학을 통해서 명성을 얻고 돈을 벌어도, 마니교에 귀의해서 종교에 심취해도 영혼의 갈증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렇게 방황하던 어느 날 이웃집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게 되었다. “톨레 레게, 톨레 레게(집어 들고 읽으라)”라는 이 이상한 노래를 듣고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처박아두었던 어머니가 주신 성경책을 찾아 펼쳐 읽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성경은 바울 사도의 말씀이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라”(13:13). 한 절의 말씀이 그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 후 끊임없이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고통의 십자가를 그 누구보다 사랑하다가 반달족에 의해 순교를 당하셨다.

말이 아닌 삶의 능력이 참 능력임을 알게 될 것이다.” 수사학을 통해 높은 부와 명성을 누리던 어거스틴에게 어머니 모니카가 한 말이다.

초라함과 굴욕 속에 머물게 했던 시간들,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할 것 같은 실패자의 모습으로 두려워 떨고 있는 그 순간들, 번뇌와 고민으로 가슴 졸이고 애태우며 울던 그 시간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고뇌에 동참했던 보석 같은 순간이었다.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신뢰를 쌓아가는 순간이었고 십자가가 없는 그곳이 도리어 더 고통의 자리였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예수님은 그분의 천국을 사모하는 많은 사람을 가지셨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그분의 십자가를 지는 자는 적다. 예수님은 자기 위안을 구하는 많은 사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난을 바라는 자는 심히 적다. 예수님의 기적의 예찬자는 많이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분의 십자가의 치욕에 복종하는 자는 적다.” 이용도 목사님의 말씀이 나의 메마른 마음의 우물에 눈물이 고이게 함도 분명 이 때문일 것이다.

동족으로부터 매국노라는 서슬 퍼런 비난과 조소 속에서도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전했던 예레미야도 제사장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건만 궁핍과 박해 속에서 스스로 비천한 자로 살아갔다. 구덩이 속에 던져져도 한 마디 원망조차 하지 않았다. 조롱과 비난을 퍼붓던 백성들을 위해 도리어 바보처럼 밤낮으로 내 백성을 어이할꼬.” 하면서 중보 참회의 눈물만 흘렸다. 그에게는 종일토록 당하는 모욕과 치욕이 고통이 아니었다. 마음이 바짝바짝 타들어갈 만큼, 골수에 사무칠 만큼 도리어 십자가 없는 삶이 큰 고통이었다(20:8-9). 그러기에 날마다 죽음과 직면하며 십자가를 달갑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끝내 홀로 먼 이국 땅에서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갔다.

스스로를 버려진 폐인과 같은 인간 기생충이라 고백하면서 평생 온 몸이 굳어버린 채 40년 동안 가시밭을 걸어가면서 감사가 끊이지 않던 나의  선생님. 뇌경색으로 오른쪽 뇌세포가 반 이상이 파괴되었을 때, 따르던 많은 제자들도 조롱과 비난을 퍼부으며 곁을 떠났다. 손해와 희생과 연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선생님의 말씀이 그들에겐 버겁고 힘겨운, 무거운 십자가였고 중환자로 전락한 스승이 무능력하고 약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섭섭해 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다만 기도하며 주님만을 묵묵히 바라보셨다. 약삭빠르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였을지라도 모순덩어리처럼 느껴지는 십자가를 늘 마다하지 않으셨다. 다시 태어나도 고통의 가시밭길을 걷겠노라고, 그 무엇과도 수치와 약함과 고통을 바꾸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언제나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즉각적으로 따라가셨던 선생님은 진정한 십자가의 의미를 우리 안에 새겨놓고 가셨다.

겉으로는 선한 것 같으나 말과 지식만 앞세우는 사랑 없는 거짓된 행실은 허수아비 십자가에 불과하다. 이 땅에서 부와 명예와 성공을 얻은들 무슨 소용 있으랴. 허례와 위선과 겉치레로 세워진 지푸라기 십자가는 홀라당 다 타버릴 잿더미에 불과하다. 비록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지라도 오물로 범벅이 된 지푸라기와 같은 세상의 것들에 연연해하지 말자. 가장 고상한 지식, 보배로운 예수님의 생명을 얻기까지 선한 의지와 빛 된 행실로 붉은 십자가를 순간순간 세우며 쉼 없이 달려가자.

모순덩어리처럼 느껴지는 십자가 안에 참 지혜와 능력이 있다.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이는 그 십자가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 이 길은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걷는 길이다. 어렵고 힘들고 고달프고 부대껴도, 오르고 또 올라야 하는 길일지라도 피로 붉게 물든 그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전진하며 가야 한다.

주님 가신 길이라면 태산준령 험치 않소. 주님 가신 길이라면 가시밭도 싫지 않소, 주님 가신 길이라면 거지됨도 싫지 않소. 주님 가신 길이라면 하늘 끝도 높지 않소, 방울방울 핏방울만 보고 따라가리라.”

십자가를 지고 가도록 허락하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라면 기꺼이 지고 가야 한다.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