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주님 내가 주님과 변론할 때마다 언제나 주님이 옳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께 공정성 문제 한 가지를 여쭙겠습니다. 어찌하여 악인들이 형통하며 배신자들이 모두 잘 되기만 합니까. 주께서 그들을 나무를 심듯이 심으셨으므로 뿌리를 내리고 자라며 열매도 맺으나 말로만 주님과 가까울 뿐 속으로는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12:1-2 표준).

예레미야의 따지기 식 질문은 우리 모두 한 번쯤을 퍼붓고 싶었던 심보일 것이다. 애매한 누명 뒤집어쓰고, 잔인한 오해 화살촉 심장에 깊이 박혀 헐떡거릴 때에도 하나님은 침묵만 하셨기 때문이다. 유대인 600만 명이 히틀러에게 살육당하며 피를 토할 때에도 그냥 눈 감으신 것 같았다. 아랫것들이 상전의 냄새나는 발을 씻는 법이거늘, 임금보다 더 높은 스승께서 후줄근한 무식쟁이의 발을 씻어 주시겠다고 성큼 다가와 땅바닥에 무릎을 대는 기습행위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처사였다. “절대로 내 발을 씻을 수는 없습니다!” 옹고집을 부리며 손사래 치는 베드로에게 던지신 예수님의 답변은 화사한 햇살이 안개를 거두는 열쇠 같은 말씀이었다.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13:7).

11별과 해, 달까지도 자기에게 절하더라고 재잘거린 꿈 사건으로 형들의 분통을 건드리고 종놈처럼 팔려 노예생활 수년간, 감방살이 10여 년으로 청춘을 날려버린 요셉이 총리되기 전날 밤까지 그 신비를 감히 눈치라도 채었을까? 복수 당할까 빌빌대는 형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요셉의 늠름한 모습은 전능자의 답변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나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마음으로 괴로워할 것도 얼굴을 붉힐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숨을 살리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45:5). 설명도 없이 앞서 보내시는 하나님! 한 마디라도 귀띔해 주셨더라면 서러운 자갈밭 길목이 훨씬 수월했을 텐데.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7:14). 장래 일을 모르고 사는 것이 최선의 생존 방식이라고 단정 지으신 것 같다.

힘없는 집단이나 만만한 상대에게 느닷없이 쳐들어가 땅뺏기, 보물 훔치기, 생명 죽이기를 일삼았던 악랄하고 잘난 자들의 짓거리에 지금은 당하기만 하지만, 샅샅이 폭로되는 엉큼대왕의 정체를 최후의 그날에는 밝히 볼 것이란 말이다. 자기는 사정(射程)거리 밖에 있다고 방정떠는 오만하고 능글능글한 소위 대지도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혼쭐나는 참상도 그 날에는 훤히 보리라. 곱살한 여인인 줄 알았는데 한입 가지고 두말 쏟아 가슴에 칼질하면서도 용케도 잘 피해 갔던 그 발칙한 혀 놀림을 천국 비디오로 선명하게 보게 되리라.

안방에 가면 시어머니의 말이 옳고 부엌에 가면 며느리의 말이 옳다는 속담이 있다. 세상에 같은 시각을 가진 두 사람은 없는가 보다. 어정쩡한 세상에서는 곧은 것만을 고집할 수 없을 것 같다. 눈물이 사슬 되어 발걸음을 묶어도, 나보다는 더 억울하게 살아오신 예수님 바라보며 천국의 답변을 남겨놓아야 하리라. 눅눅한 습기 속에서도 천국을 끌어다 사는 멋진 사람처럼 의젓이 살아야 하리라. 어차피 세상은 어둠에 속했다. 황소에게 시비 걸 미련한 생각은 접어두자. 시시콜콜 따져서는 피곤만이 오는 세상이다. 꾹꾹 눌러둔 진지한 질문은 천국에 가서 소상히 그 답을 듣기로 하고, 보상받을 부채도 역시 그때 풍성히 받아내기로 하고, 푯대를 향해 마구 달리자. 홀가분하게 일터로 향하자. ! 설레는 가슴으로 그날을 기다리자.

이동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