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에 알리라

 

신앙생활을 하면서 말씀을 지키려고 애쓰지만 자신의 나약함과 온전히 내려놓지 못함으로 자주 넘어질 때가 많음을 점점 깨닫게 된다. 그 이유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정확히 지적하신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계명을 지키는 자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적기 때문이다.

지키다의 의미는 준수하다는 뜻과 더불어 보존하다, 주의를 기울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관찰하다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는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4장은 예수님이 아버지께 가야 할 때가 온 것을 아시고 제자들을 위로하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의심 많은 도마 사도, 우리의 모습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예수님의 답변은 언제나 명확하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보았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사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은 쉽게 흘려듣지 않는다. 마음에 고이 간직하며 새긴다. 우리 또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말씀을 마음판에 깊이 새겨야 한다. 그러나 말씀을 온전히 마음판에 새기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넘어지고 일어나고 또 넘어지고 일어나는 긴 과정을 수없이 되풀이해야 한다. 말씀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40년 광야 길을 걷게 하신 우리 주님, 이 길은 잃어버린 주님의 사랑을 찾아 가는 길이다. 불신과 염려와 재리로 이 땅에 발목이 붙잡힌 세상의 끈들을 끊어버리고 믿음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고 하였듯이, 언제나 그렇듯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소원해질 때마다 어떤 자리에서 구원을 받았는지 순간순간 떠올려야 한다. 영원히 지옥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지옥형벌을 감수하신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강하고 무한한지를 자주 묵상할 때 말씀을 지킬 능력이 주어진다.

가족이나 이웃을 섬기다 보면 서운함과 속상함으로 시험에 들기도 한다. 때로는 그들이 무거운 짐처럼 느껴져 우울함에 빠져 무기력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함으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나아갈 때 말씀을 지키는 것은 우리에게 더 이상 무거운 멍에가 아니다.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나침판이다.

말씀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희생과 고난을 감수하는 것이요, 모욕과 굴욕과 무고를 참는 것이요, 나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축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세에서는 왠지 손해보는 것 같고, 어리석어 보이고,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참 많다. 그러나 그날에는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이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으로 함께하시는 그날에 말이다.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그날에 덜 후회하고 부끄러워하리라는 것을.

그날을 위하여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으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이집트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결박과 옥에 갇히는 고난을 감수하고, 돌에 맞고, 톱에 썰리고, 칼로 죽임을 당하며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11:24-37).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는 온갖 고난과 핍박을 겸하여 받으나, 그날에는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맨발의 성자, 최춘선 목사님의 아들 최바울. 살아생전에는 미치광이로 불리는 아버지가 너무 창피하고 싫었다. 그러나 훗날 그는 고백한다. “70년대 초에 우리 집에 자가용이 다섯 대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하루에 와이셔츠를 두 번이나 갈아입는 멋쟁이셨어요.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유학을 할 때는 5개 국어를 능통하게 하는 수재였답니다. 전국을 다니시며 부흥사로 활동을 하시기도 했는데, 갑자기 말씀을 깨닫고 나서부터 그 모든 것을 주님처럼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며 다 버리셨지요. 저희 오남매가 아버님 때문에 너무나 힘들게 성장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렇게 목사가 됐지만 동생들을 모아놓고 예수 믿지 말자,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사니까 믿지 말자.’ 말했을 정도로요. 그러나 제가 예수님을 믿고 나니까, 그전엔 교회만 왔다갔다 했지요.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나니까 왜 아버님이 그렇게 사셨는지 이해가 되더군요. 정말 다 내어주고 기쁨으로 사신 게 예수님 때문이구나.”

다 내어주고도 기쁨으로 살 수 있었던 최춘선 목사님,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며 살 수 있었던 힘은, 다름 아닌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었다. 언제나 그날을 바라보고 살았던 온전한 신뢰에서 오는 견고한 믿음이었다. 그분의 고백을 통해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는 말씀이 우리 귓가에도 생생해 들려오는 듯하다.

세상에 부러운 사람이 없고, 무서운 사람이 없고, 보기 싫은 사람이 없고 얼마나 감사한지요. 부러운 것, 부러운 사람이 없는 사람은 법률 없이 일등 부자예요. 미운 사람이 없는 사람은 세상의 일등 권세요. 세상 왕들의 억만 배 권세예요.”

박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