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종들이 기다리고 있을텐데

전도사가 된 어머니

어머니는 극구 반대하셨지만 이번만은 내가 고집을 부려서 어머니 환갑잔치를 억지로 해 드렸다. 어머니를 교인들과 교역자들에게라도 자랑하고 싶었다. 친구들과 친척들 그리고 교역자들과 함께 식당을 빌려 회갑잔치를 했다. 다 끝나고 났더니 어머니가 무척 기뻐하셔서 감사했다. 처음 어머니의 업적이 세상에 보인 것이라 나 스스로도 흐뭇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머니는 나에게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얘야, 나는 평생 네 뒷바라지만을 해왔어. 그런데 나도 이제 하나님의 일을 하러 가고 싶구나. 네가 내 생활비만 대주면 대구 평리교회에 가서 봉사하면서 전도사 노릇 좀 하고 싶다.”

나는 깜짝 놀랐다. ‘어머니가 안 계시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나?’ 상상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머니 소원을 들어드리기로 했다.

평리교회는 내가 미국에 유학을 가 있는 동안 어머니가 북한에서 혼자 오신 민병련 목사님의 살림을 해드리고 같이 심방도 다니시면서 계셨던 곳이다. 어머니도 용기를 내기는 하셨지만 힘든 일인지라, 나는 마음을 바꾸시기 원했다. 그러나 결국 워낙 의지가 강한 분이라 자유를 드리는 것이 효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머니를 대구로 떠나보냈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다니시던 공장에서 오후와 밤에 일하기로 하시고 오전에는 평양여자성경학교를 다니신 일이 있었다. 여 전도사들은 개인전도와 심방 봉사 등이 몫이어서 어머니가 잘 감당하시리라 생각했다. 얼마 안 되어 어머니가 섬기시는 교회를 찾아가 보았다. 어머니는 놀랍게도 훨씬 젊어지셨다. 어머니는 나이가 비슷한 분들에게 형님! 형님!”하며 섬기고 계셨는데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신 것 같았다. 모든 교인들을 어머니처럼 사랑으로 보듬어 주시는 모습에 나는 놀랐다. 정말 처음으로 어머니는 행복을 맛보시는 듯싶었다.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구나!’ 감탄하며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그 후에도 찾아가 볼 때마다 교회는 초대교회처럼 뜨거운 사랑의 교제가 있었고, 전도의 열정이 넘쳐 있었다. 어머니 말씀에, 정신병으로 고통받는 가정이 있었는데 하루에 한 번씩 찾아가 기도했더니 정신병이 낫게 되어 덕분에 교회에 나오게 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전도를 받은 사람이 교회에 나오는 것을 보면 무척이나 기쁘다고 하셨다.

어느덧 10년이 지나 어머니도 70세가 되었다. 어머니가 담석증으로 고생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어머니는 수술이 잘 되어 감사하게도 건강이 회복되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교회로 다시 가시겠다는 것이다. 남자들도 70세가 되면 은퇴해야 하는데 이제는 편찮으시고 연세도 되셨으니 교회에 사표를 내자고 했다.

어머니는 평리교회를 평생 잊지 못하셨다. 평리교회 역시 어머니를 잊지 않으시고 권사님들이 자주 우리 집을 방문해주셨다. 심지어 어머니가 90세가 넘으셨을 때에도 네다섯 분의 권사님들이 찾아오셔서 위로해 주시곤 하셨다.

낮고 소박한 삶

내가 제때에 밥을 먹는지에 대해 어머니는 지극한 관심을 갖고 살아 오셨다. 내가 어른이 되어서 교회와 사회 활동으로 바쁘게 다닐 때에도 반드시 무엇을 먹었는가를 물어 보셨다. 나는 내가 뭘 먹었는지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물어보시면 대답하기 곤란할 때도 있었다.

어렸을 때 아침밥을 거르고 학교에 갈 참이면 어머니는 나를 붙잡아 앉혀 놓고서는 밥을 먹어야만 학교에 갈 수 있다고 하셨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눈물을 떨어뜨리며 밥숟갈을 들었다. 그러고 보면 어머니의 교육은 엄격했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의 친구 분 중에 30대 때부터 가장 가깝게 지내신 분이 대만 선교사로 가셨던 정성원 권사님이다. 그분은 우리가 다녔던 동평양 교회의 여 전도사님이셨다. 아버지의 사촌 형님께서 그 전도사님과 우리가 한 집에 같이 살도록 집을 마련해 주셔서 같은 부엌을 쓰고 살았다. 우리 어머니와 정 권사님은 친형제처럼 지내셨다. 그분은 선천 보성여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셔서 아들 둘을 데리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셨다. 남편 되는 분은 중국에서 사업을 크게 하신다는 소문만 들었다. 정 권사님 역시 무남독녀로 자라셨다. 그분에게도 어머니가 계셨는데 늘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데.”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곤 했다. 정 권사님의 말씀 때문인지 어머니는 내 앞에서 눈물을 전혀 보이지 않으셨다. “내가 너 때문에, 내가 너 하나 믿고 살았는데.”라는 원망어린 말씀도 하신 일이 있었다. 어머니도 자기 설움에 눈물 흘릴 일이 왜 없으셨겠는가! 아마도 기도하시면서 많이 울었으리라고 짐작하지만 힘드셔도 언제나 괜찮아!”로 일관하셨다.

언젠가 다리가 아프시다면서 기도원에 좀 갔다 오겠다고 하시고 나가셔서 몇 주간 계시다 오셨는데 다리가 다 나았다는 것이다. 그후 90세가 되기까지 잘 다니셨다. 어머니가 불평 하나 없으셨던 이유는 굳은 의지와 하늘의 소망을 굳게 믿고, 기도로 이겨내셨기 때문이었으리라.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강한 의지와 믿음과 사랑을 온유한 인품 속에 감추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부산 피난 시절에 급성 맹장염이 걸려 죽을 듯한 모습으로 병원에 가는데 어머니는 나를 위로하시면서 진찰도 하기 전에 자신 있게 무슨 일이 있겠니. 좀 참아라.”라고만 할 뿐 조금도 당황하시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의 모습에 놀라고 말았다. 외동딸이 죽는다는데 어쩌면 저럴 수 있는가 생각했다. 아마도 기도로 하나님께 확답을 얻으셨던 모양이다.

교수로서 가르칠 때 나는 건강한 편이기는 했지만 몇 가지 병이 있었다. 아침에는 몹시 두통이 심해서 눈 뜨기가 힘들었고, 체한 것은 아닌데 빈혈처럼 토하기까지 할 때가 있었다. 몸살이 몹시 나서 열이 난다든가 할 때는 나는 으레 직장에 전화를 걸어 결근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결근은 안 된다고 하셨다. “주의 종들이 기다릴 텐데 어디 누워 있겠니? 기어서라도 가야지!”라고 하셨다. 나는 꼼짝없이 택시를 타고 얼굴이 하얗게 되든지 붉게 되든지 관계없이 학교는 가야 했다. 그러면 어찌된 일인지 강의 책임을 맡거나 더 중책을 감당하게 되곤 했는데 아무래도 어머니의 기도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여학교에 다닐 무렵 어머니는 사춘기 딸에게 많은 주의를 주곤 하셨다. 때로는 좀 가혹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남학생들이 뒤쫓아 따라오면 뒤돌아서서 신발을 벗어 귀때기를 때려 주라는 것이다. 나를 따라다니는 남자도 별로 없었지만 그럴 만한 용기도 없었다.

나는 지금도 비교적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삶은 어머니가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또 어머니가 원하는 바였다. 1956년 미국 유학을 가면서 비로소 파마를 했고, 양장을 입었다. 그 전에 내 스타일은 보통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 정도였다고 기억한다. 내 옷차림은 어머니로부터 언제나 오케이를 받아야 했다.

검소한 살림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스타일이라고 지금도 나는 믿는다. 어머니 역시 자신의 옷차림이라고 할 수도 없는 단순하고 소박한 옛 스타일, 즉 긴 겉저고리에 옛날식 바지와 짧은 치마도 긴 치마도 아닌 껑충할 뿐인 치마였다. 어머니는 천국만 바라보고 사시는 분이셨다. 화장이라고는 크림 한 가지뿐이었다. 그래서 노인이 되어서는 온통 얼굴에 주름살이었다. 그러나 주 선생보다 어머니가 더 훌륭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다. 우리 어머니를 잘 알고 겪어본 사람들의 평, 100퍼센트 맞는 말이다. (계속)

주선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