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누룩을 제거하라

초등학교 4학년 즈음으로 기억한다. 숙제에 도움도 되고 여러 가지 궁금증을 풀어주는 백과사전시리즈를 즐겨봤는데, 하루는 책꽂이 높은 쪽에 있는 책을 무리하게 꺼내다가 책상을 덮고 있던 두꺼운 상판유리를 깨고 말았다. 아버지가 비싼 것이라고 누누이 조심시켰던 것이었는데, 어린 마음에도 너무나 당혹스러워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그 백과사전을 제자리에 넣어두고, 너무나 두렵고 막막해서 동네를 혼자서 마구 헤매며 걸어 다녔다. 집에 들어가는 것이 두려워 결국 해가 져서 집에 돌아왔다. 방에서 가슴 졸이며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 못가서 아버지의 화난 목소리가 우레처럼 들려왔다. “누가 이 유리를 깨뜨렸냐?” 아버지는 평소, 당신의 물건이 제자리에만 없어도 크게 화를 내시던 분이라서 정말이지 내 간은 콩알만 해졌다. 아버지는 마당에서 불을 피운 양철통에 유리를 사냥총으로 깨뜨리시면서 계속 화를 내셨다. “누가 깨뜨렸어?” 도저히 나설 용기가 없었다. 방안에 숨어서 모르는 일인 척 시치미를 떼고 있었지만, 쿵쿵 뛰는 심장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큰 남동생이 아버지께 혼이 나기 시작했다. “네가 했지?” 극구 부인하는 동생의 말을 아버지는 믿지 않으셨다. “네가 아니면 이런 말썽을 부릴 사람이 우리 집에 누가 있어?” 아버지는 평소 호기심으로 아버지의 물건을 자주 손대고 녹음기나 전화기 등을 분해해서 고장 내기 일쑤였던 큰 동생을 범인으로 확신하면서 마구 나무라셨다. 그렇게 그 사건은 마무리 되고 말았다. 큰 동생이 나의 죄에 대한 누명을 톡톡히 쓰고 결국 된서리를 맞은 것이다. 그 일은 내가 자라는 동안 두고두고 양심에 찔림이 되었다.

큰 동생이 그 당시 얼마나 억울하고 상처를 받았을까 싶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회개했지만 실토할 용기도 나지 않고 그냥 덮어둔 채 많은 세월이 지나고 말았다.

그 동생이, 목회를 시작한 누나 교회라고 매주일 빠지지 않는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집안에 장손이라는 이유로 가족과 친척들에게 과도한 의무를 지다보니 피해의식에 강박증으로 대인기피가 심한 것이 문득 예전의 그 사건이 동생에게 적지 않은 상처를 낸 파편이었겠구나, 싶은 생각이 되었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그 사건을 얘기하고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동생은 그런 일이 있었나? 기억이 안 나는데한다. 또 이어서 하는 말이 더 고마웠다. “내가 그 때 말썽을 많이 부린 것은 사실이었지, 거의 매일 혼이 나지 않은 적이 별로 없었는 걸

고백과 사과로 그 때 받았던 동생의 상처가 완전히 치유됐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30년이 넘도록 묵은 죄책감과 미안함을 털어놓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또 한 가지는, 최근  조카와 대화 중 오랜 시간 묻혀 있었던 상처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 이야기는 내게 있어 매우 쇼킹한 이야기였다.

아들 시온이와 동갑인 조카는 어릴 적 방학이면 자주 우리 집에 놀러왔었다. 그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로 기억한다. 자신이 시온이와 작은엄마와 성경을 읽었을 때, 자신은 더듬더듬 읽고 철자를 많이 틀려서 읽으면서도 너무나 창피스러웠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자 아들 시온이는 자폐증세가 있어도 성경읽기를 꾸준히 시켜서 그런지 곧잘 읽어내려 가는데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그 아이가 너무나 읽는 것이 서툴러서 의아해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 아이의 괴로움을 알지 못하던 나는, 우리 집에 오면 가정예배를 드리며 성경을 교독했다. 조카는 고2가 된 지금까지도 책 읽는 트라우마에 크게 시달리고 있었다. 수업시간에 책읽기 순서차례가 될라치면 죽고 싶을 정도로 공포스러웠다는 것이다. 훤칠한 외모에 키도 크고, 운동이면 운동, 춤이면 춤, 연극 등 다방면으로 탁월한 기량을 보이는 그 아이가 그런 트라우마에 시달릴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아이는 그때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피나는 노력을 했다고 한다. 타고난 재능은 별로 없지만 남들보다 몇 배로 노력해서 얻은 결과라고 한다. 그러나 책읽기에 나타나는 트라우마는 여전하다고 했다. 그것만큼은 노력해도 개선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면서 조카를 너무 몰랐고 이해하지 못해서 상처를 준 것 같아서 내심 충격을 받았다. 혹시나 그 때 내 마음 속에 내 아이와 비교하면서 그 아이를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기억을 더듬어보면서 어렴풋이 마음으로 지은 죄를 생각해보았다. “작은엄마가 정말 몰랐다. 미안해.” 용기를 내어 진심어린 사과를 했다. 그리고 성경을 하루에 꼭 한 장씩이라도 읽으면서 하나님께 간구하면 고쳐주실 것이니 함께 기도하자며 권면하였다.

정말 본의 아니게 또는 이기심과 아집으로 인하여 주변사람들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게 되는지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시고모님들이 또래 자녀들을 비교하고 자랑하며, 시기 질투하는 모습을 보며 유치하고 세속적인 사람들이라고 정죄했던 내게도 그런 악한 마음이 잠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주님을 회초리로 때리는 것과 같다. 무심코, 또는 의도적으로 던진 돌을 이웃이 맞고 마음에 피를 흘릴 때 주님께 돌을 던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혹시라도 지금 이순간도 내게 맞은 상처로 인해 아파하는 이웃이 있는지 돌아보며 이웃을 찾아 진심으로 사과하며 상처에 사랑의 약을 발라 싸매어 주어야겠다. 여러 관계에 있어 얽기고 설켰던 쓴 뿌리의 넝쿨을 한 뿌리씩 제거해 가야한다.

몸도 마음도 정결케 하여 하나님과의 화목도 이루어야하지만,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던 말씀처럼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묵혀두었던 죄와 허물들을 실토하고 용서를 구하며 화목을 이루어야겠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5:7).

주님의 희생으로 묵은 누룩을 제거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언제든 우리 안에 묵혀 두었던 것들을 꺼내서 회개하기만 하면 그것은 큰 은혜로 변한다.

주선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