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맑고 깨끗한 선물

나는 누구인가

제논(Zenon)이라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제자 가운데 허영심이 대단하여 겉모양에만 마음을 쓰고 사치와 낭비가 심한 제자가 있었다. 제논이 그를 꾸짖자 제자가 답한다. “그만한 돈이 있어서 쓰는데 무슨 잘못입니까?” 그러자 제논이 엄하게 책망한다. “그러면, 소금이 많이 있다고 요리하는 사람이 음식에 소금을 막 집어넣으면 그 맛이 어찌 되겠는가?” ‘내 마음, 내 돈, 내 것을 내가 쓰는데 무슨 절제가 필요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 것이니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생각의 오류다.

바울 사도는 자기 자신을 절제했다. 그가 가진 것들은 당대 사회에서 최고의 가치와 권력, 명예를 소유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자랑할 만한 당당한 것들이었다. 히브리인이요 로마시민권자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바리새파다. 그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긴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 이유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말했다. 결국,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알아가면서 최고의 것을 발견한다. 예수님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희생을 하면 할수록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고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딤전1:15)라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예수님 안에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내가 작아지고 보잘 것 없어지는 것이 십자가의 원리다. 주님이 드높여 질수록 내 삶은 육이 쇠해지는 것이다. 내가 살아나고, 내가 누리고 싶은 것들이 쌓여갈수록 주님은 저 멀리 달아나기 마련이다. 이것이 영적 이치다. 자신을 절제한다는 것은, 주님보다 더 드러나는 것, 주님보다 더 소유하던 것들,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로부터 떠나고 비워지는 순간을 기뻐하는 것이다.

육신의 가족들을 만나 대화하고 음식을 나누고, 안락한 것을 즐기는 순간, 나는 이미 가족이 주는 따스함과 기쁨을 맛보며 영적인 마음이 약해진다. 영적 동료라고 여겨지며 안심하는 자리에서 판단이라는 이름을 가장한 무절제한 언어로 누군가를 비판하고, 정죄하기도 한다. 나 자신을 믿고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자주 넘어지고 실수를 하며 어둠속으로 빨려 시나브로 들어간다. 그래서 성인(聖人)들은 그토록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돌아보기 위한 참회와 절제의 이름을 삶의 중심으로 놓고 살았던 것이리라. 내가 누구인가. 사도바울이 말한 죄인이다. 아직도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지 못하여, 틈만 나면 육적인 것을 탐하고 정욕을 허울 좋게 포장하고, 이웃과 비교하여 실망하고, 작은 명예에 목숨을 건다. 사소한 일에 불같은 화를 내기도 한다. 자존심이 건드려지면 속상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다.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나를 바로 보면, 나는 죄인이고 죄인 중 괴수다.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나 자신을 보는 사람은 이웃에게도 눈과 마음이 간다. 무엇을 보고 기도해야 할 것인가 고민하게 된다. 나에게 급급하여 내 가족과 교회만 챙기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주님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죄인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기도하고 절제하며 헌신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최근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실현됐지만 남북관계는 여전히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북한의 심각한 경제난은 수많은 아이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있으며 정치범수용소에서의 인권유린의 참상은 이미 세계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주체사상 하에 끔찍한 종교 탄압이 이어지고 있으며 기독교인 박해가 매우 극심한 상황이다. 뉴스에는 연일 북한이 발사한 동해상의 미사일이 탑 순위에 올라 불안을 조성한다.

얼마 전, 생활고에 시달리던 서울 송파지역의 세 모녀가 동반 자살을 한 뉴스가 있었다. 많은 교회들과 목회자들이 각성을 외쳤던 기억이 있다. 연일 교회와 성도들의 기도와 관심을 부르는 뉴스는 쏟아져 나오고 있다. 앞으로는 더 할 것이다. 악으로 치닫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정치권은 날마다 이기적인 자신들만의 전쟁을 치르고 있고, 기업들은 나태와 허영을 만족시키는 편리하고 안락한 것들을 내놓으며 경쟁한다. 문화는 음란의 도가니로 더 깊이 들어가고 있고, 교육은 1등만이 살아남는 세상을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깨끗해야 할 종교는, 이단과 사이비가 우후죽순으로 들어와 교회를 무너뜨리고 있고 성도들은 보기에 그럴듯한 사상들에 분별없이 빨려 들어가고 있다. 미디어가 발달하여 컴퓨터, 스마트폰, SNS 등으로 인해 생기는 죄악의 문제들은 그 도를 넘어서고 있어 두렵기까지 한 실정이다.

영적 쇠퇴기와 침체 속에 방황하고 있는 한국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 넣을 수 있는 회복의 이름은 무엇일까. 이 땅의 가치관으로 물들어 점점 희미해져 가는 천국적인 가치관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실천하는 지성인

이탈리아의 젬마 성녀는 국 먹을 때 구멍 뚫린 숟가락을 쓰셨고, 페루의 로사 성녀는 아름다움을 없애기 위해 인도 후춧가루를 얼굴에다 발라서 흠을 내셨다. 프랑스의 잔느 귀용은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온갖 박해와 핍박 속에도 자기를 부인하는 기쁨을 즐겨하였다. 성 베네딕토나 프랜시스 같은 분들은 여러 가지 불순한 욕망이 일어날 때마다 자신에게 채찍질을 가하며 절제와 참회의 날들로 삶을 일구어가셨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 이러한 분들의 이야기들이 어떻게 다가올까. 말도 안 되는 먼 옛날이야기로 여기기도 하고, 그 시대니까 가능한 것이라고 적당한 명분을 내세워 나에게까지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 말고도 얼마든지 주님을 잘 섬길 수 있다고 성경을 펼쳐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욕망을 절제하며 자신을 바로 보기 위해 쳐서 복종시키는 사람만큼 겸손한 사람이 있을까. 주님을 위해 태산 같은 일을 하다가도 유혹에 무너지고 넘어져서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성경은 말씀하신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34:18).

나에게 말한다. 이제 그만. 쉬는 것은 충분해. 게으름은 죄악이야. 제발, 좀 더 절제하며 통회하는 사람이 될 수 없겠니. 더 가까이 주님께 가고 싶은 오롯한 열망을 품고 제대로 실천하는 지성인이 되어 보자. 죄인임을 아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자. 기도해야 할 많은 것들을 보고 들을 때마다 무릎을 꿇어 주님께 아뢰자. 매사에 성실하고 민감한 영적 사람이 되어보자.

주님의 마음이 머무는 맑은 곳은 어디일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욕망을 철저히 절제하고 참회한 분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이웃의 아픔을 돌아보며 내 일처럼 중보 하던 분들의 심령이 아닐까. 그분들의 기도가 오늘 우리에게까지 임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입고 사는 것은 아닐까.

청년들과 애양원에 갔을 때, 손양원 목사님의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라는 분의 아드님이 목사님이 되어 애양원 성산교회에 오셔서 수요예배 설교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안 목사님은 단상에 올라가서 10분간 눈물만 흘리더니 얼마나 이곳에 오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라는 말을 꺼냈다고 한다. 수 십 년을 마음에 무거운 짐을 얹은 것처럼 고통하며 살았을 그 마음에, 용서와 사랑으로 눈물 나게 하신 분은 손양원 목사님이었다. 혈육간의 애정을 극복하고 원수까지 사랑 하라고 하신 말씀을 실천한 그 빛이 오늘까지 이르러 은혜의 강물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내게로 와서 쉬라고 하시는 귀하신 주님께 드릴 맑고 깨끗한 선물은 절제와 참회다. 어둠 가득한 내 안의 정과 욕심들을 절제하고 끊어가면서, 더 맑고 깨끗한 선물을 들고 부활의 기쁨 속으로 달려가자.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