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오아시스를 찾아

 

세월호 참사 이후 박근혜 대통령이 총체적인 개혁을 시도하고자 새 총리 후임자로 문창극 후보자를 지명했다. 그는 5대째 신앙 가문의 장로이며, 신실한 신앙인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언론인의 사명감으로 사회를 관찰하고 분석하여 과감하게 건전한 비판을 가하고, 대안을 제시해 왔다. 하지만 총리 후보자로 임명된 순간부터 왜곡된 언론 보도로 공격당하기 시작했다.

발목 잡는 세상

몇 년 전에 교회에서 했던 신앙 강연을 이유로 검증의 기회조차 막으려는 야당의 총공세와 일부 여당의 가세에 불편함이 생긴다. 우리나라 정서상 친일파니 국민을 모독했다느니하는 말은 극히 예민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문 후보는 그동안 힘겹게 해명하다가 급기야 자진 사퇴하고 말았다. 원래 국회청문회란 특정 후보자가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건전한 인격을 가졌는지 상식선에서 검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행태는 다분히 당리당략과 정치적 논리가 깔려 있어서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비종교인의 입장에서는 문 후보자의 신앙 강연이 낯설게 들려 자칫 그 진의를 오해할 수 있다고 본다. 일제 식민지배도, 남북분단도, 6.25전쟁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니 납득이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도가 너무 심했다. 강연 전체를 들어보면 그 내용이 건전하고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앞뒤 잘라먹고 단 한두 문장을 가지고 극단적으로 비방하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조차도 그 칼날을 비껴갈 재간이 없으실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10:29).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모든 나라와 역사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고 증거한다.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2:21).

그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는 신앙을 바탕으로 강연한 것이다. 그것을 정치 논리나, 당리당략으로 왜곡하고 공격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헌법에도 보장하고 있는 한 개인의 기본 권리인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다. 말과 글은 그 맥락이 중요한데, 현 사태는 말꼬리잡기에서 시작되었다. 앞뒤 말 자르고 문장 하나만 달랑 떼어서 자기 좋을 대로 공격한다면 예수님이라도 이런 검증을 통과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의 지도층들을 향해 심하게 여러 번 책망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심지어는 독사의 새끼들아!”(23:33)라고 하셨다. 딸이 아파서 절박한 심정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15:26)고도 하셨다. 사람을 개 취급하셨으니, 그 당시 인터넷이 있었다면 아마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의 강연은 우리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있고, 우리는 그 뜻을 깨닫고 부강한 나라, 세계역사의 중심이 되는 대한민국을 만들어가자는 것이었다. 나라의 문제점도 지적하면서, 지도자들의 잘못 때문에 일제 강점과 분단의 시련이 닥쳐왔고, 국민이 고통당했다는 것이다. 강연 어디에서도 국민을 모독하거나, 나라를 가벼이 여기는 내용이 없다. 오히려 대한민국을 하나님이 높이 들어 쓰시도록, 나라가 개혁되고, 좋은 지도자가 세워지고, 정신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고 했다. 온 국민이 화합해서 통일시대를 대비하고 좋은 지도자를 세워서, 대한민국이 세계중심이 되는 날을 앞당기자고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인사권은 대통령에게 있다. 대통령이 국정을 잘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인물이라면 지켜봐주고 응원하는 것이 마땅하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오늘날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 무슨 의인 선발대회를 하는 듯하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라. 정치인들 중에 누가 의인이 있는가. 그렇게 비판하는 자신들은 얼마나 의롭고 깨끗한가 묻고 싶다.

어른을 찾아서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어른이 없다는 것이다. 그분 앞에 가면 내 부족함을 깨달아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는 그런 어른 말이다. 다들 자신이 애국자요 의롭다고 하는데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그러하기는 교회도 마찬가지다. 성경과 예수님에 대한 교리와 설교는 많은데 정작 그 주님의 영성을 닮은 어른은 찾기 어렵다.

날씨도 점점 무더워지고, 아직 세월호 참사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는데, 정치인들과 사회지도층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자꾸 심기가 불편해진다. 이 더위에 우리를 시원스럽게 해줄 오아시스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 교회사에는 초대교회의 열두 사도들과 교부들, 그리고 그 계보를 잇는 영성의 어른들이 많이 있었다. 히포의 감독 어거스틴, 아씨시의 성 프랜시스, 개혁자 마틴 루터,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 요한 웨슬리, 칼빈, 중국의 워치만니, 일본의 하천풍언, 인도의 성자 썬다싱, 한국의 이용도·주기철·이성봉·손양원 목사 등이다.

하나님은 이런 어른들의 강력한 성령의 맑은 물로 부패한 교회와 사회를 정화시키고 새롭게 하셨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그 수원지에서 물이 흐르지 않고 오랫동안 정체되어 썩은 듯한 고약한 냄새가 난 지 오래다. 그간에 기복주의, 물량주의, 믿음만능주의라는 오염물질이 쌓이고 쌓여 그 위험수위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이제 우리가 잃어버렸던 영성의 대가들인 어른을 찾고자 하는 것은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절박함에 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보다 더 깊고 폭넓게, 말로만 아닌 삶과 인격으로 울려주는 어른들을 갈망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4:15).

돈과 탐욕에 찌들어 케케묵어 냄새나는 교회와 사회의 묵은 때를 말끔하게 씻어줄 맑은 영성의 어른들을 만나고 싶다. 내 속의 부패한 속성을 세세하게 다 드러내어, 무엇이 빛인지 어둠인지, 영적인 것인지 육적인 것인지, 하나님 중심과 나 중심의 차이를 명쾌하게 깨닫게 해주는 영적인 어른들을 만나고 싶다. 개혁은 외부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