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무엇에 중독되어 있는가?

식중독이나 약물중독만이 문제였던 단순한 시대가 있었다. 요사이는 인터넷 중독, 알코올 및 마약 중독 등 심각한 인간 파괴로 공습해 오고 있다. PC방에 앉아 잠과 음식 먹는 것도 잊은 채 밤낮 사흘간 게임에 열중한 중학생이 쓰러져 죽은 일도 있었다. 당구 중독에 걸린 목사가 토요일 밤늦게까지 당구를 치고 주일예배 때 강단에 서는 순간 교인들 머리가 온통 당구공으로 보였다는 실화도 있다. 중독은 어떤 일에 푹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질적인 불순종의 중독에 묶여 있었다.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렘22:21). 애굽을 꼼짝 못하게 다룬 하나님의 신기한 기적을 눈앞에서 감탄하며 목격한 저들이었다. 그런데도 원망 중독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성형수술 중독에 걸려 스무 차례 이상 얼굴에 칼을 대고도 만족을 못 누리는 시대다. 네로의 아내가 당나귀 젖으로 얼굴화장과 목욕을 하느라 500마리의 당나귀를 길렀고 외출할 때는 50마리를 끌고 다녔단다. 화장중독에 걸린 채 비참히 죽을 것도 모른 채 말이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아! 찬란한 천국에 들어가 깜짝 놀랄 만한 영광의 약속을 받은 복덩이들아(신33:29)! 아직도 슬픔이 그렁그렁 매달려 스데반의 빛나는 얼굴빛을 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마땅히 진멸할 원수를 앞에 두고도 여호수아처럼 햇살이라도 잡아당겨(수10:13), 사탄의 진지를 정복하려는 의지를 포기한 까닭이 무엇인가. 깨어 일어나자! 새벽이다. 벌떡 일어나 무릎 꿇어 기도로 무장할 기백을 상실한 채, 밋밋하고도 어정쩡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중독에 빠져서가 아닐까? 아내나 남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멸시 중독, 걸핏하면 부부간에 싸우는 다툼 중독, 그럭저럭 지내려는 안일 중독, 겨우 주일예배 한 번 참석하고 안심하는 나태 중독, 모이면 남 비평하는 험담 중독, 무심코 화를 폭발하는 분노 중독, 회개보다는 변명 중독, 비렁뱅이 거지처럼 없는 것만 끄집어내는 불만 중독에 중심을 잃은 것 같다. 부패 중독, 분열 중독, 세속화 중독, 물질 중독, 음란 중독, 쾌락 중독 등이 세계를 삼키려 한다. 치유센터 소장(출15:26)에게 파견 받고 나간 치료 사명자들까지, 오히려 중독의 온갖 덫에 걸려 핼쑥하고 우울한 표정으로 서성거리고 있지는 않은가.

삼형제가 신앙의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셋째가 모친의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오랜 외국생활에서 돌아와 어머니의 천국환송식을 마쳤다. 큰형은 셋째에게 어머니가 가졌던 재산을 이어받으라 한다. “안 됩니다. 큰형님이 맡으셔야지요.” 둘째도 나는 사업하고 유복하니 형이나 동생이 맡으라고 한다. 큰형은 다시 셋째에게, “그럼, 넌 무엇을 갖고 싶으냐?” 묻자 “저는 외국 생활을 하기에 고향과 가족이 그립습니다. 어머니가 보셨던 성경 하나면 족합니다.” 했다. 그러자 큰형이 “어머니 성경은 마땅히 장형인 내가 가져야 한다.”고 강하게 말했다. 믿음에 중독(?)된 부러운 가정의 이야기다. 신실한 어머니가 보셨던 성경을 천하의 보배로 계산한 바른 눈 가진 형제들이다. 세계 제일의 달콤한 가정의 영롱한 모습이다.

주님 품에 풀썩 안겨(예수님께 중독되어) 틈을 내주지 않으므로 일곱 귀신이(마12:45) 감히 넘보지 못하게 하자. 하루 일곱 번씩 찬양하는(시119:164) 찬양 중독에 몰입 당했으면 좋겠다. 요단강에 풍덩 들어가 일곱 번 씻고 나온 나아만 장군처럼, 은혜의 강물에 뛰어들어 어린아이 살같이 거룩하게 빚어진 신생아처럼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다(왕하5:14).

이동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