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루함 중에 만난 하나님

인생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듯한 극한 한계에 부딪힐 때가 있다. 계획하던 일이 무산되고, 하던 일에 실패를 맛볼 때 인생의 큰 위기감을 느낀다.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떠나보낼 때 고통을 느끼며 인생의 무기력함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느끼며 깊은 공허감에 빠질 때가 있다. 어느 누구나 신앙여정에서 이러한 공허함에 맞닥뜨리게 된다. ‘왜 하나님은 이러한 공허함과 자신이 너무나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하시는 걸까. 왜 이러한 환경을 허락하시는 걸까의문투성이 일 때가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공허함을 통해 영혼을 단련시키신다.

비루함이 인생 중에 높아지는 때에 악인이 처처에 횡행하는도다”(12:8). ‘비루함은 무가치함이나 공허함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우리의 인생에 공허함이 몰려 올 때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어둠의 세력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할 때 하늘을 우러러본즉 거기에 빛이 없다”(4:23)고 말씀하셨다. 마귀는 우리의 공허함을 틈타서 영적인 무기력함에 빠지게 한다. 우리의 마음에 공허함이 높아질 때, 나팔 소리와 전쟁의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4:19). 하지만 이러한 공허함이 높아질 때에라도 영적 아사상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시편기자는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한다’(시편19:2)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의 깊은 밤을 통하여 영혼을 단련하신다. 그리고 영혼이 단련된 만큼 어둠과 빛을 분별할 수 있는 지식을 부어주신다. 바로 이 공허함은 영혼의 깊은 밤을 지나가는 데에 꼭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가운데 일어나는 공허함을 통해 영적투쟁을 치르길 원하신다. 즉 마음고생을 통하여 우리를 닦달질하셔서 영혼을 정결케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가운데 깊은 고독과 공허감이 찾아올 때, 세상적인 쾌락과 정욕으로 채우려고 할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은 더 곤고해지고 어둠의 세력이 처처에 횡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점점 영적인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된다. 우리가 이러한 때일수록 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공허함과 함께 찾아오는 영혼의 메마름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거쳐 가게 하신다.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16:7). 하나님은 고난의 밤을 통과케 하셔서 우리의 영혼을 교훈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우리를 권고하시고 감찰하신다(17:3).

하나님은 오늘도 흠이 없는 영혼, 입으로 범죄지 않는 정결한 영혼, 말씀을 좇아 사는 영혼을 찾고 계시다. 그러기에 깊은 고독, 무가치함, 공허함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더 간절히 찾도록 이끄신다. 우리의 영혼을 단련하셔서 하나님과의 일치로 나아가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온실 속의 화초보다는 벼랑 끝에 비바람을 맞으며 찢기어진 화초를 더 좋아하신다. 왜냐하면 영적투쟁을 거친 사람만이 진정코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도 죄로 어두워진 사람들에게 무가치한 존재로 여겨져 영문 밖으로 쫓겨나셨고, 죽음의 골짜기에 이르자 사랑하는 제자들마저도 떠나버리는 엄청난 고독과 메마름을 몸소 겪으셔야만 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과 끊어지는 그 엄청난 아픔, 그 공허함을 그 누가 다 이해할 수 있으랴. 육신적, 정신적 공허함을 한꺼번에 느끼셨던 주님의 그 고통과 쓰라림을 그 누가 대신 할 수 있으랴. 밤을 통해 단련되어진 영혼. 벼랑 끝에 비바람을 맞으며 찢기어진 화초가(영혼이) 더 멀리 더 진한 향기를 날린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공허함을 통해 겸손케 하신다.

우리는 시편기자를 통해서 다윗도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처럼 동일한 절규를 외치셨다는 것을 만나게 된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22:1). 왜 이토록 처절한 고백이 성군 다윗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일까. 아마도 그가 겪은 수많은 고통 중에서도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쫓겨 달아날 때가 아니었는가 싶다. 그는 도망자라는 불명예의 이름을 안고 아들에게 쫓겨 정처 없이 떠돌아 다녔다. 그는 머리를 풀어 헤쳐 얼굴을 가리웠고 맨발로 울며 감람산을 올라갔다. 그 화려하고 많은 신하들, 궁녀들을 뒤로한 채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처량한 신세가 되어버린 다윗. 마치 그 모습은 예루살렘성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면서 많은 백성들로부터 환호성을 받던 예수님이 영문 밖으로 쫓겨나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배고픔, 추위, 불안함보다 사랑하는 아들로부터 버림받은 그 비참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마음에 파도치는 그 공허함과 고통을 그 누가 다 헤아릴 수 있으랴. 더구나 울며 도망치는 다윗이 바후림에 이르자 엄청나게 충격적인 소리를 듣게 된다.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의 일행을 따라오면서 돌을 던지며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삼하16:7). 그것은 벨리알의 사람이라는 뜻으로 가치 없는 것’, ‘없어질 수밖에 없는 것’, ‘살만한 가치가 없는 놈이라는 욕설이다. 옆에서 함께 따르던 아비새가 몹시도 흥분해서 다윗에게 말하였다. “왕이시여!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제가 당장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예수님의 곁에 말고의 귀를 베는 베드로가 있듯, 다윗의 곁에는 아비새가 있었다. 그러나 다윗 왕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16:11). 그는 고통을 통해 겸손을 배웠다. 그는 고통을 통해 비아돌로로사즉 십자가의 길을 주님과 함께 걸었다. “그는 사람이 아닌 벌레다.” 여기저기서 돌을 던지고, 침을 뱉고, 수염을 뽑고, 뺨을 때리고, 입을 비쭉 이고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께 저주와 욕설을 퍼부었던 그 길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은 그 길이 하나님이 명하신 길이기에 결코 원망과 불평을 하지 않으셨다. 다윗도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자신에게 하찮은 백성인 시므이가 저주를 퍼부어도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이니 잠잠히 받아들이셨다. 다윗은 그러한 고난을 통하여 겸손을 배워나갔던 것이다. 왕이신 예수님이 인간에게 버림받는 자리까지 내려가셨던 그 겸손을 다윗은 고통과 공허함을 통해 얻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찾아오는 공허함은 오히려 우리에게 영적인 축복이다. 샤를를 후꼬 성자가 사막에서 우리에게 붙여온 편지를 통해서도 우리는 다시 한번 진한 감동과 전율을 느낀다. “현실로는 불가능합니다만, 완전하게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가운데 완전하게 나 자신을 없애는 일 이외의 일을 혹시라도 내가 할 수 있다면, 나로서는 완전한 실패, 영원의 고독, 모든 일에 있어서의 좌절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천대받는 일을 나는 선택하였다.’ 거기에는 그분의 비하와 십자가에 대한 우리들의 최대의 일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나에게는 언제나 모든 것에 앞서서 바람직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무가치함, 고독, 공허함은 우리가 영적 부요함으로 나아가는 길,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다. 겸손으로 비워진 공간. 이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의 공허함. 그 자리에는 예수님의 생명이 들어올 것이다. 하나님의 빛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혼돈과 공허는 제 자리를 찾게 된다(1:3).

이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