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를 기쁘게 할까

c8b8b0edb7cf2.jpg기독교 선생의 모델

그때만 해도 젊은 과부는 보쌈해서 업어간다는 말이 있었다. 어머니는 젊은 티를 가리기 위해 머리 수건을 눌러 쓰고 항상 검은 치마 당목적삼이나 흰 저고리를 입고 다니면서 언제 나는 사십이 되지?’ 하며 걱정하는 말을 종종 하셨다. 지금 같으면 젊게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 보통인데 어머니는 늙어서까지도 옷 한번 화려하게 입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어머니가 늘 시장바닥에서 장사하는 아주머니처럼 하고 다니는 것이 불만이었다. 하지만 젊어서부터 노인처럼 하고 다니는 습관이 들어서 좋은 옷을 불편하다면서 나 좋으면 됐지.” 하셨다. 내가 교수인데 어머니가 그렇게 입고 다니면 사람들이 나를 불효자라고 욕할 것이니 제발 입어 달라고 해도 마다하셨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딴 생각하게 될까봐 겉치장을 그렇게도 안 하시는 것 같았다. 나 하나를 키우기 위해 남편의 따뜻한 사랑이 있는 가정생활과 여성으로서 가장 즐거워하는 고운 옷차림마저도 포기하시고 초라하게 일생을 지내신 내 어머니였다. 그 자체가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은 내가 늙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나를 기독교 선생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굳게 결심하고 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시켰다. 어머니는 내 학비를 감당하기도 버거운 형편이었지만 비싼 레슨비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피아노를 배우게 하셨다. 음악에 별로 취미가 없던 나는 2, 3년을 억지로 연습하여 겨우 교회에서 찬송가 반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는 딸을 기독교 선생으로 만들려고 하셨지만 무슨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인지 당최 모델이 없었다. 막연히 교회의 찬송가 반주자 정도였을 것이다. 주변에서 그 이상 기독교 여성 지도자의 모델을 찾아볼 수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여학교 시절, 김활란 박사가 미국을 다녀오셔서 평양 숭실대학 강당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박사님은 검은색 두루마기를 입고 단발머리를 하고 계셨다. 그분을 처음 보는 순간, “! 저분이 정말 기독교 여자 선생이다.” 어머니도 나도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기독교 여 선생의 모델을 처음으로 찾았던 것이다.

내가 중년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나에게 검은 두루마기를 한 벌 해입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나는 왜 하필 검은 두루마기냐.’고 물었다. 아차! 물어보는 순간 어머니는 아직도 김활란 박사님의 검은 두루마기를 기억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딸이 기독교 여성 지도자가 되었다는 기쁨에서 그때의 감격을 회상하시는 듯했다.

이웃사랑

내 친구가 어머니를 위로하느라 어머니! 주 선생은 혼자 자라서 어머니께 못해 드리지는 않아요? 섭섭하게 해드리지는 않아요?”라고 물은 적이 있었다. 어머니의 사랑에 응석은 부려도 효성스럽게는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던 터라 어머니의 대답을 흥미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잠깐 생각하시더니 나는 뭐 그런 것 생각할 여지가 있나? 나는 자고 일어나면 오늘은 누구를 기쁘게 할까, 그 생각하느라 섭섭하다는 생각을 할 새가 없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이 바로 어머니 삶의 철학이었다.

내가 학교에 다녀오면 어머니는 바쁘게 일하고 계셨다. 어떤 날은 인절미를 떡판에 손수 찧어서 맛있는 고물을 만들어 떡을 만드셨다. 어떤 때는 녹두를 잔뜩 담가 놓으시곤 했다. 그 당시에는 맷돌에 갈아서 녹두전을 했는데, 일하는 사람과 같이 맷돌을 돌려 빈대떡을 만드셨다. 우리 식구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친구와 친척, 아니면 교회 노인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한 목적이었다.

간장이나 된장도 직접 만드셔서 탁아소나 아는 사람들에게 직접 가져다 주셨다. 용산 시장이나 휘경동 시장까지 버스를 타고 가셔서 흙 묻은 도라지나 나물을 잔뜩 사 와서는 손수 다듬고 손질해서 이웃에게 나누어 주셨다. 서울 망원동 집 마당이 넓어 한 켠에 텃밭을 만들어 드렸더니 호박, 가지, 토마토, 오이를 키우셨다. 우리가 다 먹을 수도 없지만 이웃들과 나누는 것을 좋아하시는 어머니는 나누는 즐거움에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밭을 일구셨다. 100평이 넘는 잔디밭도 깨끗이 손수 손질하셨다. 어머니는 쉴 새가 없으셨다.

어머니 장례식에서 김기복 목사님이 추모사를 하시며 우리 변정숙 권사님이 해주시는 만두, 냉면 안 잡수어보신 이가 제자들 중에 있습니까?”라고 하셨다. 손님 대접하기를 기뻐하셔서 학생들이 방문하기만 하면 빼놓지 않고 일일이 대접해서 보내곤 하셨다.

어머니께서 온유하고 총명하고 신실하셨음은 시장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돈이 더 왔다고 도로 갔다 드리곤 하셨는데, 내가 나가면 시장 아주머니들이 어머니 칭찬을 하며 안부를 묻곤 했다. 부지런한 어머니는 일을 하시면서도 주머니에 성경 구절을 손수 써서 넣고 다니며 외우셨다. 80세가 넘으셨어도 히브리서 11장을 통째로 외우셨다.

새벽기도회는 걸음을 걸을 수 있었던 근 90세까지 빠짐없이 다니셨다. 주일이면 네 번 예배에 참석하셨다. 하나님께서 건강도 주셨지만 열심히 주를 섬기려고 애를 쓰신 분이셨다. 어머니 삶의 철학은 내가 누구를 기쁘게 할까?’였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봉사 생활임을 아시고 힘을 다해 봉사하셨다. (계속)

주선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