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번 죽을지라도

얼마 전, 가을 끝자락의 토요일, 청소년 영성학교 학생들과 경기도 이천에 있는 어농성지(聖地)에 다녀왔다. 어느 순교자의 무덤 앞에 쓰여 있던 글귀는 “천만번 죽을지라도 저 십자가 형틀에 묶이신 분을 배반할 수 없소”였다. 많은 말들이 오가고, 아름다운 가을 풍경과 은혜로운 많은 것들이 눈앞에 있었지만 오래 기억되는 것은 순교자가 남긴 한마디 말 뿐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사랑에 취해, 결국 죽음으로 밖에 사랑을 표현 할 길이 없었던 사람들이 순교자다. 그리고 그들이 표현한 최후의 사랑을 우리는 순교라고 말한다. 순교는 인간이 부인해야 하는 최후의 보루고, 마지막으로 내 놓아야 하는 가장 귀한 것이기에 그 의미는 복되고 거룩하다 하겠다. 성경에 기록된 자기를 부인하고 죽기까지 사랑하는 일을 순교라고 정의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닮아가는 모습이기에 그 의미가 복되고 가치로운 것이다.

죽음에 대한 기록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1938년 투옥되었다가 1939년에 잠시 출옥하였을 때, 주기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설교를 하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고 넋이야 있건 없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이는 우리 선인들의 나라를 사랑하는 충의대절입니다. 사람이 나라에 대한 의가 이러하거늘 하물며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님 향한 일편단심 변할 수 있으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신앙의 대의를 붙잡고 풀무불에도 뛰어 들었고,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정신을 가슴에 품고 사자굴 속에도 들어갔습니다. 예수를 사랑하여 풀무불이냐! 예수를 사랑하여 사자굴이냐! 그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스데반은 돌에 맞아죽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렸습니다.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동방에 내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나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도 주님 향한 대의정절 변치 아니하오리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살으사이다. 여러분, 예수는 살아계십니다.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살으사이다.”

일제치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거부할 수 없이 당연하게 치루어야 하는 의식 신사참배. 그것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목숨 같은 의식이었다. 설령 기독교인이어도 그 시절엔 그것이 적당한 합리화로 지나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모두가 그랬고 세상이 그랬으니까. 누구 하나 돌을 던질 용기도 없었고, 돌을 던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더 몰인정하고 잔인한 사람이 되던 시절이었으니까. 거기서 누구나가 되지 않고 홀로 독야청청 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다. 수백 번 고통하며 내면의 명분과 합리화와 싸움을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 고통의 순간에 주기철 목사님을 정돈시켜 준 말씀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였다. 그 순간 모든 고통이 물러가고 마음에 기쁨이 일었다. 단순해졌다. 그렇다. 끊을 수 없다. 환난이나 위험이나 적신이나 칼이어도 천만번 죽을지라도 예수님과 끊어질 수 없다. 그래서 죽음을 벗 삼아 나아간다. 그것이 기쁨이고 은혜고 은총이다. 그래서 그 죽음은 순교라 부르게 된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목숨과 바꾸는 일로 기록이 된다.

사랑하며 고통을 겪는 일

작은 꽃 소화 테레사는 순수한 사랑을 드려 주님을 기쁘게 한 일생을 살았다. 삶 속의 고통과 어려움, 기쁨과 슬픔을 주님께 드리기 위해 매일매일 전쟁 같은 삶을 살며 노력을 한 분이다. 작은 것의 은총을 구하며 날마다 작게, 더 작게, 부서지기 시작하는 일생을 결단했다. 모래알처럼 부서져서 자아의 흔적조차 없길 소망했다. 나는 죽고 주님은 살아서 역사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누구보다 작고 작은 자, 그러나 그 작음을 통해 주님에 대한 사랑은 누구보다 크고 높은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세상에서 그 어떤 이도 자신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가 없길 바라며 주님에 대한 사랑을 독차지 하고 싶어했다.

“사랑하며 고통을 겪는 것은 가장 순수한 행복입니다. 나는 좋으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날 사랑하시도록 내어드릴 뿐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주 많이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일이 고통이 된다면 기꺼이 포기하고 싶은 일이 되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더구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은, 육신이 죽고 영이 사는 일이니 날마다 육신이 죽어가는 소리를 고통스럽게 들으며 감내해야만 한다. 부모형제, 자매, 친척, 이 세상에 속한 것은 물론이고 가장 사랑하는 자기 자신마저 부인해야 하는 일이기에 고통의 시간은 길고 아프기만 하다. 영적이지 않은 것들을 버리고 끊어가는 일은 육신을 입은 이들에겐 아프고 아픈 일이다. 그것을 순수한 행복으로 여기지 않으면 좋으신 하나님은 악하고 못된 나쁜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장미 비, 스물넷의 약속이라는 책에 기록된 소화 테레사는 말했다.

“난 언제나 실수하고 작고 부족하지만 주님이 나를 위해 빌어주시니 나의 긴장감을 적절하게 사용해서 하루에 충실하자. 두려워하진 말자. 사랑은 단지 기분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 ‘작은 길’. 특별하고 눈에 띌 만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각광을 받거나 신문에 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작은 길에서는 평범한 인간 생활을 벗어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단지 한 가지만 필요하다. 크고 강하며 성실한 사랑! 학교에서 또는 일터에서, 주방의 냄비 옆에서 또는 외양간에서. 환자를 간호하든 또는 환자가 되어 누워있든.

‘작은 길’ 위에서는 사람이 땅바닥에 바늘을 주워 올리든 황금 성전을 짓든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거창한 행동을 보지 않고 그 안에 있는 사랑만을 보신다. 비밀리에 사랑으로 이룬 작은 일은 종종 커다란 업적보다도 더 가치가 있다. 그것은 외적 거룩함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사랑을 헤아리기 때문이다.”

고통이 사랑이 되려면 얼마나 더 걸어가야 할까. 고통은 그저 고통이고, 행여 작은 고통이라도 오면 그것으로 인해 아무것도 못하는 엄살쟁이가 되는 현실. 소화 테레사의 한마디가 참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분 안에 거하여 살아간다는 은혜가 아닐까.

“나는 내가 그렇게도 부족해 보이고 하나님의 자비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예수님의 생활 속으로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으면 스스로의 영혼이 처한 한심스러운 처지를 깊이 느끼게 된다.

『고백록』(Soliloquia)에서 고백하기를 “저는 주님과 제 영혼을 아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그 이상은 알고 싶은 것이 있습니까? 그 이상 아무것도 알고 싶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했다. “오! 영원하신 주님이시여, 제가 저 자신과 주님을 알도록 도와주십시오.”

예수님 외의 것들에 눈을 돌리며 복잡하고 어지럽게 분주하고 살아가면 나는 나를 알지 못한다. 일만 보이고 이웃한 사람들이 보일 뿐이다. 일의 결과와 사람들의 허물과 티, 혹은 그들이 내게 가한 작은 상처들이 내 영적인 일들을 갉아 먹는다. 나는 지치고 외롭고 허무해진다. 죄인인 나를 알고 주님의 깊은 마음을 헤아려 이루어 그 뜻을 지혜롭게 이루어 드리는 일을 잘할 수 있다면. 죽음에 이르는 날들이 다가온다 해도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기 위한 일이 되기를 소원한다면. 단순하게 명쾌하게 예수님의 생명을 소유하는 일에 목숨을 걸고 나아간다면. 내가 죄인임을 깨달아 날마다 울기를 그치지 않고, 자비한 눈으로 이웃을 바라볼 수 있다면. 먼지처럼 흩날리는 분주한 일들에 마음 쏟지 않고 날마다 주님 사랑에 애가 탄다면.

또 다시 부르는 절망어린 소원이 넘쳐 나지만, 다가올 희망이 될 수 있기에 아주 작은 기쁨의 노래를 읊조리며 무릎을 꿇는다. 천만번 죽을지라도 사랑해야 할 내 하나님을 향하여.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