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참된 주인공

20세기 최대의 역사학자인 영국의 아놀드 토인비 교수(1889-1975)는 역사 철학을 확립한 저서 『역사의 한 연구』(A Study of History)에서 세계 역사와 26개 문명의 순환적 발전과 쇠퇴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역사와 문명은 엘리트 지도자로 이루어진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y)의 지도 아래 주어진 환경의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함으로써 등장한다.”

예를 들면 황하문명지인 중국의 남쪽에는 양자강이, 북쪽에는 황하가 흐르고 있다. 황하문명은 땅이 비옥하고 강수량이 풍부한 남쪽의 양자강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땅이 척박하고 홍수가 잦은 황하 유역에서 발생하였다. 이것은 중국 최초의 문명이 엘리트 지도자가 중심이 되어 치수 관계사업을 잘 관리함으로써 이루어진 결과다.

그는 많은 구체적 사례를 통하여 역사 발전에 적용되는 보편적 원리를 발견하고, 이를 도전과 응전의 법칙(The Law Of Challenge Of Response)이라 불렀다. 특히 문명은 그 지도자의 창조적 응전이 멈추었을 때 쇠퇴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역사에도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믿음의 선진이라는 소수의 영적 엘리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는 이어져 왔다. 그들은 교회가 타락하고 쇠퇴해 갈 때마다 역사의 한 줄기 빛으로 교회의 생수 근원지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의 가치관과 관점으로 볼 때 그들은 결코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결코 눈에 보이는 숫자나 규모가 아니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창조하셨다.”고 하셨고,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서는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모든 역사의 절대적 주권자시다. 이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반드시 온전하게 성취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만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믿음의 눈이 있는 사람만이, 보이는 역사 뒤에서 도도히 흐르고 있는 보이지 않는 영적 실체를 볼 수 있고 그 존재 의미에 자신을 집중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이런 믿음의 선진들이 이룩해 놓은 믿음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기록하면서 결론적으로 이런 분들을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이라 하였다. 믿음의 선진들은 자신의 존재 의미에 집중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자신의 사명과 그 사명에 대한 확증을 가지고 순간순간 살아갔다. 자신을 보내신 분이 누구신지 또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자신의 삶을 통하여 증거하였다. 이와 같은 삶을 ‘향방 없는 삶도, 허공을 치는 삶도 아니다’(고전9:27)라고 했다.

역사를 보는 관점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므로(히11:3), 눈에 보이는 역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의 그림자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것이 원인이고 보이는 것은 그것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은 영적인 것에서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잘못 끼워진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우라고 현실적인 문제를 통하여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자 지혜다. 그렇지 않으면 깨달을 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보는 관점과 영적 세계에 대한 개인적인 확신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이 관점과 확신이 매일 살아가는 삶의 태도와 내용을 결정하고, 우리의 눈을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께 집중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 삶의 목표와 방향과 가치관이 행한 대로 철저하게 갚으시는 하나님의 절대법칙에 맞추어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역사의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는 역사 이면에 흐르는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섭리를 믿음의 눈으로 직시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종말론적 소망과 기쁨 속에서 뚜렷한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으로, 어떤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또 역사의 참된 주인공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며 모든 환경을 넉넉히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역사의 참된 주인공

역사의 참된 주인공은 하나님 뜻 안에서 영적인 눈으로 역사를 보는 사람이다. 이들의 삶은 세상적 기준으로 보면 때로는 매우 어리석고 실패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이요 가말리엘 문하의 뛰어난 제자요 세상적으로 출세가 확실하게 보장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세상적 기준으로 본다면 완전히 망한 사람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적인 눈으로 역사를 다시 보았기 때문에, 이 모든 세상적인 조건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새롭게 확신한 영적 목표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총체적으로 결산하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 그리고 천국의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견고한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순교의 영광으로 자신의 삶을 마쳤던 것이다.

이와 같이 역사의 참된 주인공들은 자신에게 순간순간 어떤 최악의 환경이 도전해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며 오직 하나님 홀로 영광 받으신다면 자기가 다 깨어지고 어떤 비천한 자리에 처할지라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역사의 현장에 언제나 임재하시고 그분의 의지와 주권에 따라 그의 나라를 완성하고 그의 뜻을 반드시 성취하신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로 역사의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다. 마지막 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간결하고 분명하다. 그것은 순수한 무교병의 진리를 하나님의 밝은빛을 따라 실천하는 가운데 익은열매되어 천국 곳간에 추수되는 것이다. 이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하여 우리도 바울 사도처럼 우리의 모든 것을 던져버릴 수 있는 믿음이 절실히 필요하다.

교회사 2000년을 통하여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천국 건설사업에 기둥같이 쓰임 받았던 성도들, 즉 그리스도의 신부들(계22:17)은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 세계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역사의 참된 주인공이 되어 살아갔다. 우리 모두도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에 따라 자신의 분야에서 진지하게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하나님의 뜻을 이룩하는 역사의 참된 주인공으로 동참해야 하겠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창조적 소수로서 역사의 참된 주인공이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면,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포기하고 주님 한 분만으로 충분히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훈련을 부지런히 받아야 할 것이다.

정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