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축복 더 하노라
지난 달, 2박 3일간 탁발(托鉢)훈련을 하였다. 탁발은 ‘맡길 탁’과 ‘바리 때 발’을 뜻하는 한자로서, 자신의 밥그릇을 맡기고 의탁하는 의미로, 단순히 밥을 얻어먹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영성훈련 중의 하나다. 매년 하는 훈련이지만, 언제나 그렇듯 첫날은 살짝 긴장이 된다.
가까운 주유소 부근에서 차를 얻어 타기 위해 트럭 기사 한 분에게 행선지를 여쭈어 보자 험상궂은 얼굴로 “안 갑니다.”라는 퉁명스런 말을 했다. 동일한 반응이 계속 이어졌다. 멋쩍고 무안했지만 다시 용기를 내어 세차를 하고 계신 한 분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는데, 뜻밖에도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며 반갑게 인사를 해주셨다. 그리고 현재 신앙의 냉담자라고 하면서도 성령의 기름이 부어지는 복된 길이 되라고 축복까지 덤으로 해주셨다. 아쉽게도 행선지 방향이 달라서 차는 탈 수 없었지만 다소 무거웠던 다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IC까지 다시 걸어가는데, 태양 볕이 뜨거운 탓에 등 뒤로 땀이 흘러내렸다. “배낭이 무거우니까 좀 힘이 드네요.”라는 한 자매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IC 입구, 횡단보도 옆에서 히치하이킹(hitchhiking)을 여러 차례 반복을 하던 중 전주에 물류를 운반하는 25톤 덤프트럭 기사 한 분이 차를 세워 주셨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서산휴게소에 다다르기까지 기사분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느껴졌다.
그분은 사업의 부도로 인해 가정이 무너지고 큰 고통을 겪으면서 나름대로 인생의 행로와 삶의 가치를 오랫동안 찾고 계신 구도자였다. “지식이나 돈이나 권력 그 어느 것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어떤 고통과 문제를 맞닥뜨릴 때, 우리는 비로소 마음이 가난해져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라고 전도를 하면서 마음속으로 주님께 그분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화살기도를 드렸다. 서산 휴게소에 내려 간단히 찰떡파이와 비스킷 하나를 먹는데도, 주님이 주시는 평화와 자유로움에 행복감이 밀려왔다.
세 차례 차를 얻어 타고 목적지인 해미순교성지에 도착을 하였다. 이름 모를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터전인데, 처형당한 순교자는 약 1000명에 이르지만, 이름이 기록된 순교자는 132명에 불과하고 그 이외에는 이름을 알지 못한다. 몇 번 순례를 한 곳이기에 큰 기대 없이 기념관에 들어서는데, 나의 시선을 끄는 두 장면이 있었다. 기념관 앞의 손발이 꽁꽁 묶인 채 하늘을 우러러 보며 평온한 얼굴로 엄마와 함께 끌려가는 한 소년의 조형물과 기념관 밖의 자리개돌 앞에서 나란히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기도하는 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자리개돌은 기독교인들을 돌에 패대기쳐서 죽음에 이르게 했던 돌이다. 여러 명을 눕혀 놓고 돌기둥을 떨어트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했는데, 혹시라도 꿈틀거리는 몸뚱이가 있으면 횃불로 눈알을 지져대기도 하였다. 아직도 비가 오면 핏자국이 군데군데 자리개 돌 위에 드러나는데, 그곳에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십시다.”라는 팻말이 있다. 부모님 옆에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기도하는 아이를 물끄러미 보는데, 가슴이 뭉클해졌다. 말이 아닌 죽음으로서 믿음을 가르쳤던 이름 모를 수많은 순교의 어머니들과 풍요로운 시대에 순교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믿음의 부모를 만나는 것은 큰 복인 듯하다.
나 역시도 하나님 아버지께 많은 복을 받은 사람이다. 세상의 그 어떤 뛰어난 지식과 출중한 외모와 재능과 부를 안겨준 것보다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나게 해주신 것에 더없이 감사하다. 가난한 농부의 딸로, 작은 키와 소심한 성품을 물려주신 부모님이 한 때는 원망스러웠다. 또한 믿음의 가정이 삼대로 이어지면 하나님께서 큰 복을 내려주신다고 했는데, 별로 그렇지 않은 듯 했다.
하나뿐인 오빠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그 충격에 급성 위암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 둘째 언니까지 폐암으로 천국에 갔을 때였다. 매우 가까운 친척 한 분이 어머니에게 사람 잡아먹는 여인이라는 모진 말을 하셨다. 몇 년 사이 한꺼번에 몰아닥친 회오리바람으로 어머니는 큰 충격을 받으셔서 대장암과 혈압과 당뇨로, 왼쪽 대퇴부가 부러지는 고난의 연속으로 온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셨다. 그때 어머니는 “우리 가정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모양이다.”라며 비탄에 젖으셨다.
주변 사람 중 어떤 이는 나에게 삼대 째 믿음의 가정인데, 왜 그렇게 고난이 많은지 참 희한한 일이라고 말씀하는 분도 계셨다. 당시 나도 낙심하며, 왜 하필이면 우리 가정이냐고 하나님께 원망불평을 쏟아 부었다. 그런데 이 모든 아픔과 고통의 시간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이었음을 이제는 담대히 고백한다.
첫날 탁발을 마치고 샤론교회에서 저녁 7시에 집회가 시작되었다. 3시간 남짓한 강의가 계속 이어지는데, 몸이 피곤한 탓에 집중이 잘 안 되었다. 그런데 한 말씀이 나의 뇌리에 강하게 꽂히며 머리가 상쾌해졌다. “삼대 째 신앙이라면, 세례요한과 같은 순교자가 나와야 한다.” 신기하게도 순간 피곤이 싹 사라지며, 마음가운데 주님의 음성이 들려졌다. ‘딸아, 내가 너에게 얼마나 많은 복을 주었는지 이제는 알겠니? 너와 네 가정에 고난과 아픔과 슬픔이 있는 게 복이다. 오후에 보았던 이름 모를 순교자들처럼 나를 언제나 신뢰하며 죽음의 행렬 뒤에 서길 원한다.’
로마서 기자는 말한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다”(롬4:6-7). 하나님은 우리를 은과 금같이 연단의 불로 시험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친히 삼는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이 땅의 성공과 부귀와 영화가 아니다. 우리에게 복에 복을 더하심은 나의 행실과 마음이 정결해져 내 마음의 지경이 더 넓어지는 것이다. 또한 주님의 거룩한 빛이 우리의 내면에 깊이 들어와 죄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주변으로부터 비방과 굴욕과 수치를 당하고 있거나, 나의 산업이 빼앗겨 고통 중에 눈물을 흘리고 있거나 육신의 질병과 여러 가지 환난으로 신음하며 고통과 지금도 씨름하고 있다면, 해미순교성지 돌비에 첫 순교자 마르티노의 “그렇고말고.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하나님께 바치는 거야”라는 글귀를 들려주고 싶다.
기쁨 마음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자. 고통과 맞서며 고통을 노래하자.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그 순간에도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했던 사도바울처럼 고난을 믿음으로 뛰어넘자. 은혜는 고난과 함께 찾아온다.
“주 하나님 크신 능력 참 신기하도다. 바다와 폭풍 가운데 주 운행하시네. 검은 구름 우리들을 뒤덮을지라도 그 자비하신 은혜로 우리를 지키네. 함부로 주 판단 말고 주 은혜 믿으라. 섭리의 먹구름 뒤로 주님 웃으시네. 주님의 뜻 무르익어 곧 펼쳐지리라. 꽃망울은 쓰디쓰나 꽃은 달콤하리.”(윌리엄 쿠퍼) 
진정한 축복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데 있다. 우리의 영혼을 단련하는 마음의 닦달질과 고난은 큰 축복이요 은혜이다. 비록 우리가 땅을 디디고 서 있을 지라도 하늘의 신령한 축복을 바라보며 나그네처럼 살아가자. 고난은 변장하고 찾아오는 하나님의 축복임을 잊지 말자. 모든 소유를 다 빼앗길 지라도 예수님의 생명을 소유한 자는 잃은 자 같으나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이다. 고통 가운데서도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따르는 이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신다.
“사랑하는 내 딸아, 내가 너를 더 축복하노라.”


이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