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었다고 생각될 때

어느 아버지가 아들에게 권면한 글을 보았다.
“아들아! 인생은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이란다. 다른 친구들이 저만치 앞서 달려간다고 해서 따라 잡으려고 무리하게 속력을 내지 말아라. 너의 속도를 유지하면서 차분하게 따라 가도록 하여라. 또한 남들보다 뒤쳐졌다고 해서 포기하거나 낙담하지 말아라. 누가 빨리 달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끝까지 완주하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다른 사람보다 다소 늦었을지라도 포기하거나 낙담하지 말아라.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른 법이니까.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주 위대한 업적을 남긴 위인들도 많단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80세가 되어서야 미국 헌법의 초안을 완성했단다. 에디슨은 67세 때 연구실에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되었는데도 웃으며 다시 실험을 시작했고, 1천 5백 개의 그림을 남긴 화가 모세스가 붓을 처음으로 잡은 건 80세 때의 일이란다.”
그 중 눈에 쏙 들어오는 구절이 있다. ‘늦었다고 생각 될 때가 가장 빠른 법’이라는 말이다. 실제 세상에는 그런 일들이 많이 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의 자서전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나는 마흔 여덟 살 때부터 영어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1972년 유신이 선포되기까지 10년 동안 국회의원 생활을 했습니다. 그때는 영어를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외국의 공관 사람들이나 외신 기자들을 만나는 일이 참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피하기까지 했습니다. 영어를 배워야하겠다고 다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또 실천에 옮겨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의지는 있었는데, 끈기 있는 노력이 부족한 탓이었던 것 같습니다.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76년과 80년에, 두 번에 걸쳐서 있었던 5년간의 옥중 생활은 영어 실력을 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는 옥중에서 많은 책을 읽었고, 또 본격적인 영어 공부를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뒤늦은 영어공부였지만 나중에 미국 방송국에 출연해 그의 영어실력이 인정을 받지 않았던가. 홍영녀 할머니는 학교 문턱을 밟아 본 적이 없었지만 일흔이 되서야 손주에게 한글을 배웠다. 까막눈에서 벗어난 이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다. 삐뚤빼뚤 서툰 글씨에 맞춤법조차 엉망이지만, 20여 년 동안 써 온 그의 일기는 책으로 출판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영적인 일도 이와 마찬가지리라.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때가 가장 빠르리라.
그래서 성경에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것은 신앙에는 출발점과 도착점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다. 히브리서에는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머물지 말고 완전한데로 나가라고 말씀하였다. 신앙의 완전한 경지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 곳곳에서 완전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천국은 싹이 나고 이삭이 나고 열매가 익어야만 추수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싹이 나고 이삭이 달린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익은 열매가 되어야만 천국 곳간에 추수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익은 열매가 되는 것이 완전해지는 것이다.
바울사도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3-15)고 하셨다.
모두가 신앙의 도착점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말씀들이다. 대부분의 많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신앙의 도착점에 이르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사는 동안 부르심의 목적대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지 못하는 것이다. 즉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아비의 신앙, 익은 열매, 완전한 신앙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간의 성도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도착점에 이른다. 예수님의 12제자를 비롯하여 교회시대의 신실한 종들은 그 일을 이루었다. 우리들은 어떠한가?

때로는 내가 사는 동안 그러한 도착점에 이르기에는 늦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주님이 오실 때가 다 되었기 때문이다. 그 길이 얼마나 험하고 어려운지 짐작하기 때문에, 포기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몸도 마음도 지쳐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때가 가장 빠른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되기도 한다. 어차피 언제인가는 도착점에 이르러야 할 것이 아닌가. 앞에서 말한 어느 아버지의 말이 귀전을 때린다. ‘또한 남들보다 뒤쳐졌다고 해서 포기하거나 낙담하지 말아라’는 권면의 말. ‘누가 빨리 달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끝까지 완주하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란다’는 말. ‘그리고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다른 사람보다 다소 늦었을지라도 포기하거나 낙담하지 말아라’는 말. ‘다른 친구들이 저만치 앞서 달려간다고 해서 따라 잡으려고 무리하게 속력을 내지 말아라. 너의 속도를 유지하면서 차분하게 따라 가도록 하여라’는 말.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른 법이니까’라는 말.
이안드레